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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과 핍박이 오면 / 2017.05.21.
김동진 2019-03-03 추천 0 댓글 0 조회 564
[성경본문] 요한복음16:1-4 개역개정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실족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탄이다. 그런데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흔들리는 게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아들 카인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한다.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4:5에,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헌신이 받을 정도가 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다.(4:6,7)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누구나 죄에 빠지기 쉬운 성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아무리 점잔하다해도 욱! 하는 성질 누구에게나 있다. 사실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 그러나 주께서는 성도인 우리가 죄로 인해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요14-16장까지는 예수 믿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오늘 본문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라고 여겼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행동인줄 알았다. 바울은 유대인 중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완벽하다 할 정도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지위인 바리새인이었다. 이 같은 자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대단히 위하고 열심을 낸다고 한 그것이 하나님을 찌른 격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의 핵심을 놓쳤을 때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을 혼동하는 이유를 요16:3에서 지적한다.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과연 무엇을 놓고 씨름해야 될까 오늘은 이런 점을 살피려한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옳고 그른 것과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하지만 그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준엄한 마지막 심판에 있다. 현재 하나님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문제투성이 인간들을 불러 온전하게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듣고 보고 배운 게 죄뿐이니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희생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아랑곳 하지 않고 누가 더 옳고 그르냐 따지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 아는 일에 열정을 다하길 축원한다.

 

세상은 절대 공평치 않다. 내가 분명히 옳은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는가 그리고 저들이 저렇게 악한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느냐 하는 의문이 생겨요. 시73:1-5에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라고 했다. 오히려 악한 불신자가 잘 살고 잘 먹고 죽을 때도 잘 죽는다. 죽는 순간까지도 건강해요. 큰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다. 사기치고 나쁜 짓만 했는데도 애들은 다 공부 잘하고 땅 값이 오르고 탈세해도 안 걸리고 부실공사를 해도 사고가 안 난다. 그래서 그들은 기고만장하여 재고 다니는 거다.

 

이들은 믿는 우리 보고 “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이나 믿어라!”고 하며 헤집고 다닌다. 이런데도 하나님께서 벼락도 안 내려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깊은 혼동 속으로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제를 주제로 하여 성경을 쓴 사람이 하박국 선지자다. 합1:2-4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어째서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들에게 공격받으며 핍박과 환난 속을 걸어야 합니까? 하는 것이 이 하박국서이다. 오늘 요16:1-4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환난과 핍박을 받으리라. 그래서 미리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은 없고 그런 고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실 뿐이다. 따라서 신자가 고난을 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도리 없이 고난을 당해야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가 정당하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고난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환난과 핍박을 피하고 면하려는 노력보다도 이 핍박과 환난이 왜 내게 필요한가 하는 방향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다윗은 시 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였으니 고난은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는 힘이다.

그런데 신자들이 당하는 가장 큰 유혹이 있다면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거기서 진리를 찾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를 더 찾는다. 예수님께서 평안과 기쁨을 약속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5:11에서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기뻐서 행복해지며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것이 옳다. 그러나 솔직히 불화부터 찾아온다.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며, 아비와 아들이 싸우는 일들이 실제로 생긴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당하는 가정이 아직도 있다. “네가 예수 믿어 우리 집안에 이렇게 지지리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불신 가족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쁨과 평안을 말씀하실 때 이런 단서를 붙인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즉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다. 요15:11에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분명히 내 기쁨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기쁨은 이 세상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유지되는 기쁨과 평안이다. 이것은 세상이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은혜이다.

 

비록 환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에 감동해서 기쁨으로 고백한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려 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롬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환난 앞에 판판이 깨어지고 지기가 일쑤다. 왜냐면 약한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더욱 위험한 사실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에 핍박이나 박해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수월하게 사는 게 문제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이게 더 큰 위기이다. 악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 있음이 현대교회 위기이다. 긴장할 필요가 있다. 주의 날을 사모하며 기도로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늘 편하게 해 주세요, 배부르게 해 주세요, 등 따뜻하게 해 주세요, 환난 자체를 떠나게 해 주세요! 피하게 해 주세요!” 이정도로 밖에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우리 힘으로는 이기기 힘들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연약한 우리를 도울 보혜사를 약속하신 것이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지칠 때, 혹은 신앙생활에 회의가 왔을 때 왜 나만 이런가 하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시기 바란다. “내가 왜 이런 길을 가야 되는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는지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소서! 이런 때에 무엇이 훈련되어야 하며, 내가 아직도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기 바란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언제나 일하시도록 하기 바란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위험과 유혹이 있을 때 믿음으로 정면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 모든 어려운 과정들을 통과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수준에 서게 되기를 바란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강한 요구이다. 그러므로 제발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기 바란다. 주님께로 가는 길 편한 길은 없다. 하지만 성령께서 여러분을 강하게 붙드실 것이다. 그 어떤 위험에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승리하게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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