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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 / 2017.07.09.
김동진 2019-03-03 추천 0 댓글 0 조회 507
[성경본문] 요한복음17:1-5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수없이 많은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는 때가 많다. 내가 처음 예수님 안 뒤 기도를 알게 되었고 교회나간 지 얼마 후 학생회서기 맡아 토요일마다 예배 준비하는 일을 했다. 문제는 날씨였다. 대체로 비가 오면 출석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만 봤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음에도 간절히 기도하면 이상하게도 1시간 전에 그친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나면 다시 비가 내린다. 물론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기도를 배웠다. 참 순박한 기도였다. 물론 교회 위해 나라와 민족 위해 가족구원 위해 학업과 친구 전도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주님이 드린 기도가 소상히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면 되는지 물었을 때 주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가르쳐 주신 것이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오늘 기도는 마가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만찬을 마치면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부터 하셨다. 왜일까? 무언가 부족해서인가? 주님이 이기적인가? 아니다. 우리 주님은 상황과 형편을 다 아시며 주님께서 가야할 길을 아시고 그 길을 가신 분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한 기도부터 하심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자 하심이다. 기도의 문을 열 때 가장 먼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때로는 허물어진 모습, 혹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드러내어 그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심히 부족하니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때 주님의 빛과 사죄의 은총이 임한다.

 

주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로 기도의 문을 여셨다. 첫째 자신의 때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가? 고난의 순간이 다가옴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마지막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라 기도하셨다. 다가오는 고난을 영화로운 것으로 보셨다. 고난을 감사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그의 요청을 외면치 않으신다. 고난의 쓴잔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영화로운 날이 다가옴을 기대하고 기도하셨다. 비록 어둠이 몰려온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의 날이 오기를 기도하셨다. 변화산에 오른 예수님의 세 제자는 예수님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 나누는 것을 보고 영화를 경험한다. <영화>란 무엇일까? 삶에 최상의 순간이다. 최고의 기쁨, 놀라운 은총, 넘치는 감사, 삶에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마치 영화배우가 은퇴 직전 아카데미대상을 받게 되는 감격의 순간이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고난의 순간을 내 삶에 최고의 시간, 축복의 순간으로 받으며 감사하자.

 

도스도예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라는 고통이었다고 한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다. 어떤 이는 말했다. “고통은 불행이나 불운이 결코 아니다. 고통이란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이다. 여러분이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불행이다. 여러분이 지금 지나치게 불행하다면 그것은 곧 행복이다.” 정말 역설적인 표현이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심은 최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셈이다. 주님은 마지막 고난을 피하려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우리도 그렇다.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힘들다. 주어진 십자가를 기뻐할 때 주님 영광이 임한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 내게 없는 것도 감사하며 매 순산순간을 위해 기도하자.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날은, 이날은 주의 날일세.>

 

둘째,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아셨다. 주님의 사명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일(2)”이었다. 영생이 뭔가? 3절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여기 아는 것이란 지식이 아니라 확실한 체험이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바울은 그의 사명을 깨달은 후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행20:24)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기 바란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사랑 베푸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죄와 어둠에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여러분은 영생의 복음 전하는 사명주심을 감사하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불신자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자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지?” “그래.” “그럼 그리스도에 대해 꽤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그는 어디서 태어났나?” “모르겠네.” “죽을 때 나이는 몇 살이었지?” “글쎄.”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서 정작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잖아!” “자네 말이 옳아. 아는 게 없어 부끄럽군. 하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네. 3년 전만해도 나는 주정뱅이였고 빚을 지고 있었어. 가정은 산산조각 났고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 걸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제는 술을 끊고 빚도 다 갚았지. 다시 우리가정은 화목한 가정이 되었어. 저녁마다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지. 이 모든 게 다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걸세. 이것만큼은 나도 분명히 안다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험한 그 기쁨을 누리며 그 은혜를 나누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셋째 주님은 하셔야 할 일을 감당하셨다. 4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십자가의 길을 가겠다는 기도이다. 그 길을 가므로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기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혹 나에게 왜 이런 십자가 주셨을까 하고 힘들어할 때가 종종 있다. 가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십자가가 무거워 벗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왜 살아야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면 불끈 힘이 솟는다.

 

마리안느 수녀는 1962년 오스트리아에서 27살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왔다. 오스트리아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지만 편리한 삶을 포기하고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6천명을 섬기다 나이가 들어 짐이 되기 싫어 고국으로 들어갔다가 소록도병원 백주년기념행사로 방문했다. 기자가 묻는다. “소록도생활이 정말 행복하셨나요?” 마리안느는 두 팔을 벌려 "하늘만큼 행복했다"라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주님이 한없이 힘겹게 십자가 지고 가신다. 그는 주님께 달려가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주님은 묵묵히 지고 가실 뿐이다. 다시 그는 간청한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세요.”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모른 채 하시며 십자가를 힘들게 지고 가신다. 이제는 그가 간곡히 애원한다. “주님 제발!” 주님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처음 주님을 목격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 십자가는 저기에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 져주려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지려무나.” 마카리우스는 돌아가 그의 십자가 얼른 지고 주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웬일인가! 주님 십자가는 온데간데없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주님 가신 길 어찌 힘들지 않을까? 십자가의 고통을 주님은 아셨다. 겟세마네동산에서도 할 수만 있으면 고난의 그 쓴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셨던 주님이시다. 하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제자들 앞에서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라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셨다. 자신이 친히 높은 자리에 앉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 사람들이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고백하며 하나님을 높이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 항상 우리 기도가 이기적이거나 성공일변도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만 아니다. 솔로몬과 같은 지혜 주시고 다윗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며 요셉처럼 고난을 당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까요? 내게 주신 건강과 재능, 물질과 자녀, 모든 기회가 주님 영화롭게 빛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해야한다. 모든 것 주께로부터 왔으니 내게 주어진 현재 모습 이대로 주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면 우리는 가장 값진 삶을 사는 것이다.

 

우선, 주님과의 긴밀한 대화, 기도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의 주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보혈로 정케 하소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니 주님 손잡아 주시고 나는 연약하니 주님이 힘주세요. 나 혼자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주님께서 내 삶에 주인이 되어 인도하소서. 내가 비록 사탄과 미워하는 사람들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주의 이름으로 당당히 서게 하시며, 혹 손해 볼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 주님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게 하소서. 나를 통하여 우리 가정에, 직장에,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때를 알고 사명을 알며 그 일을 감당하는 믿음의 성도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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