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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Mumford의 고뇌
홍성효 2021-02-23 추천 1 댓글 0 조회 352
[성경본문] 사무엘상16:23 개역개정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Catherine Mumford의 고뇌

 

1829410(금요일) Derbyshire Ashbourne에서 건축업에 종사하던 John Mumford와 둘째 부인 Sarah Milward 사이에 태어난 Catherine Mumford양은 1843년 신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1844Lincolnshire Boston으로 이사했다. 15년 이상 살아서 정든 곳이다. Catherine양은 Ashborune에서 소녀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옛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보스턴(Boston)으로 이사한 후 Catherine은 그의 종형제들과 자유롭게 친교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Catherine은 자신보다 조금 연상인 종형제 있었는데 그는 풍채가 좋았고 재치가 많은 훌륭한 청년이었다. 1844년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오래간만에 자신이 태어나 자라던 고향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고향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Catherine은 소꿉 친구였던 종형제를 만나 서로 자연스럽게 만났다. 종형제는 Catherine을 사모하고 있었기에 장래 자신한테 결혼 약속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종형제로부터 청혼을 받은 Catherine은 인간적으로 매우 당황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Catherine은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르는 인물이 아니며 영적으로 자신을 도와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수용할 수 없어서 어린 소녀는 몹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Catherine는 종형제의 풍채와 재치가 많은 것은 좋았으나 외모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진실한 신앙심이 있는가를 체크해본 Mumford양의 견식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Catherine은 종형제에게 우리 함께 교회에 예배드리러 갑시다. 라고 제안하자 그는 나는 Mumford양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했다.

 

Catherine은 종형제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세심하게 경청하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그는 집회 중에 옆자리에서 측은거리며 웃기려고 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에게 성실한 믿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보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이 문제인 같았다.

 

Catherine의 귀에서는 두 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나는 사단의 소리이며 또 하나는 양심의 소리였다. 사단은 Catherine의 귀에 만일, 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드려, 결혼을 약속한다면, 그 남자를 도와서 진실한 개심으로 인도 할 수 가 되는 것에는 틀림없다.’ 고 속삭였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당한 소리 같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강력하게 양심의 소리가 그녀에게 들려오기를 ‘Catherine이여! 그와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의 청혼을 받아드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음성이었다.

 

Catherine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하다가 자신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고 성서를 펼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짝짓지(Fellowship) 마십시오,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이 되 멍에를 함께 멜 수가(Yoke Together) 있으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Communion) 있습니까?” 라고 기록된 고린도후서 614절 말씀을 읽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말씀과 같이 Catherine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했었으나 비신자와 짝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르기로 마음에 결정했다. 그리고 즉시 자신의 최종적인 결심을 종형제에 편지를 써서 아무래도 종형제와는 혼약할 의사가 없다는 취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영원히 그 문제를 쿨-하게 끝내고 말았다.

 

Catherine은 재차 그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미뤄볼 때 개성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진실한 결혼은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인격과 인격과가 접촉했을 때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결합하게 될 때 비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님께 봉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뻐해드리려고 노력했었다. 그 누가 보아도 Catherine은 선량하며 몸도 마음도 아름다운 처녀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녀는 정의를 행하기를 좋아했고 연민의 마음이 뛰어났었다. 보통 처녀이었다면 이런 정도라면 스스로 괜찮다고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외면상의 행위나 말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더 깊이 음미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완전히 용서 받았다는 확증이 없다는 것에 깨달고 어떻게 해서라도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고 싶었다.

 

Catherine가족이 보스턴(Boston)에서 런던 브릭톤(Brixton)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가 브릭톤 감리교회(Brixton Hill Methodist Church)에 출석하며 감리교의 찬송을 즐겨 불렀고, Keay 여사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반에서 웨슬리의 영적 능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서연구, 죄 자백, 사죄의 확신, 성결한 삶으로서의 간증, 형제와 자매가 이웃을 위해 후원하는 일 그리고 교회의 소그룹 인도자들이 모두 평신도들이라는 것을 배웠고 모친으로부터 청교도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그 외에도 그녀는 영혼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그녀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Finney의 복음적인 설교 말씀을 읽었고 도움이 되는 많은 기독교 서책을 연구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녀는 영적 갈증을 느끼며 나는 기독교 서적을 읽고 설교 말씀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고하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사죄의 은총을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6주 동안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방안을 걸어 다니며 작정 기도를 하며 체험을 못했다. 오히려 학창시절에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던 것이나, 과거의 저질렀던 각가지의 죄가 생각나 고통은 한층 증가 할 뿐이었다. 그때에 맛 보았던 고통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었다. 영적피곤에 지쳐 베개 밑에 찬송가와 성경을 넣어둔 체로 쓸어져 잠들곤 했다. 그녀는 작정기도 마지막 날 잠자리에서 깨여나면서 소원기도를 응답받게 되어 되었다. 1846615일 월요일 아침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Catherine은 이때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찬송가를 펼칠 때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주의 것이오니 위로 하소서!

내 주 예수만이

저의 축복입니다.

라는 어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Catherine은 사무엘상 1623절에 언급된 바와 같은 음악 치료(music therapy)를 체험했다. 지금까지도 찬송가 가시를 몇 번이나 그것을 읽고 또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으나 이 찬송을 여러 번 부르고 난 후 마음에 의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밝은 빛이 그녀의 마음에 비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구원 받기를 소원하지 않았고 구원 받았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난 즉시 의복을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어머니 방으로 달려가 자신이 체험한 새로운 기쁨을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다. 그녀는 환희에 빛난 얼굴을 하고 어머님,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저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어머니 팔에 내 던지듯이 누어 버렸던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수줍어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에 걱정되는 것이 있어도 용이하게 어머니께 털어놓지 않았으나 그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 생활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개심자가 되었고 교회 소 그룹에서 부지런히 봉사 활동하면서 설교를 해야겠다는 용기와 기도회를 통하여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는 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곳에서 감리교의 교리의 중심인 구원의 확신과 메시지가 선포될 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통합적으로 청취해야 하며 확신을 위해 개인적으로 성서를 통독하고 기도 생활을 배웠다. 그래도 가끔 배교할 마음을 느끼게 되어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투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47년 그녀는 기본적인 신학적 이슈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칼뱅의 속죄와 선택의 교리 감리교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교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1848년 아버지의 경우를 체험하고 배교자의 회복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감리교 안에서 훈련 받고 생활했다.

 

그녀가 개심한 지 1주년이 되던 해에 그녀의 일기에

 

오늘은 평화롭던 내 마음에

평화가 사라져버리고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내 마음을 괴롭히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에게

나의 무력함을 맡겼다.”

 

다음 날

 

주여,

모든 죄로부터

저를 정결케 하옵소서!

다음 한 해 동안

 

저를 붙들어 주소서!

라고 한 기도문을 기록했다. 그 이후로 Catherine Booth는 개심 하신 분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이 사실을 항상 설교했다.

 

Catherine1880년 런던 서부 지역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살리지 못한다면

머리로 믿으며

번민하는 이들의 신앙을

살리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메시지를 선포했다.

 

Catherine의 브맄톤(Brixton)의 영적 승리의 삶이 아직 까지 전 세계 여성 설교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Catherine Booth는 더 이상 설교를 하거나 찬송을 부를 수도 없이 크랙손(Claction)에서 침대 생활을 할 때 휘니(Finney)의 설교 집을 읽고 있었다.

 

그의 가족과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불러주는 찬송을 듣고 있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주의 것이오니 위로 하소서!

내 주 예수만이

저의 축복입니다.

 

이 내용은 기독교 선교회의 찬송가나, 1866년도에 부흥 찬송에도 없고 구세군 군가책에 도 없으며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영감 어린 가사에도 없다.

 

6개월 동안 작정 기도가 끝난 후에 그녀의 말에 의하면 손놀림이나 발 밟는 곳을 알지 못할 만큼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가사 내용을 통하여 Altshuler가 언급하는 동질의 원리(Iso Principle),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邪氣를 제거하고 精氣를 새롭게 하는 카타르시스의 효과, 그리고 알파파가 나오는 이완 효과를 통하여 편안함을 느꼈다. 이것은 그녀가 15 - 16살 때의 일이다. 개심을 체험은 대단히 기뻐보였다고 하며,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자심은 죽임을 부러워했다고 할 정도 이었다. 진짜로 구원의 은혜를 구하여, 그 때문에 고전했던 그녀에게 배울 곳이 없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의 미점이 그늘에 숨은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 하게요. 구세군의 어머니로, 구령자의 아내로, 가정에 있어서 나 또 공중 앞에서 눈부신 활동을 했지만 Catherine의 처녀 시절은 극히 내성적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라 등은, 물론 어느 누구에게서도 권유 받은 적은 없었으나, 그녀가 항상 출석하고 있는 성서 연구 팀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부인이 Mumford 양 기도를 인도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여도 그녀는 소리 높여 기도할 수가 없어서 때로는 몇 분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다가 가까스로 두세 마디로 기도한 일도 있었다. 이제 저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아무리 해도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팀장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팀장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그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유용하게 봉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녀의 성품이 계속 내성적이 었든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없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그녀가 쓴 일기에

오늘 저녁만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적은 없었다.

나는 큰 소리를 내면서 기도했다.

십자가는 무거웠으나 매우 보람 되었다.

나의 심장은 몹시 고동을 쳤으나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Mumford 양은 신장 질환으로 투병 생활을 했으나 날이 갈수록 차츰 회복되어 의연하게 지냈다. 18세의 한참 꽃다운 나이에 건강이 날로 쇠약해저 그녀를 알고 있는 자들은 매우 염려했다.

 

Catherine은 일기에 기록하기를

 

건강은 좋지 않았지만

심령은 날로 강해져

하나님께 봉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삶이 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겠습니다.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라고 똑같은 내용을 일기에 기록 할 정도였다.

 

Catherine이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으나 그 당시부터 성결의 은혜를 얻으려고 간절하게 소원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널리 알리고 천국에 이른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꼭 구원을 얻을 필요가 있다. 나는 성결한 마음을 갖고 싶다. 주님이시여! 저에게 정표를 해 주시옵소서. 라고 일기에 쓰여 있는 것을 보아도 그녀가 처녀시절에 얼마나 진지하게 완전한 구원을 간구하고 있었든가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처녀들이여! 내성적인 성품, 투병 중에 그녀가 이룬 위대한 활동을 생각해 봅시다. 위대한 영감이 아닐까요?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일기에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숭고하며 성결한 생활에라고 하는 것이 그녀가 17,18세의 한참 꽃다운 나이에 순진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음먹었던 목표이었다.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184718살 나이에 자신의 결심을 일기에 기록했다.

 

Catherine은 신년을 맞이하자 날마다 지켜야할 규칙을 정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것을 이루고 싶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좋은 규칙서도 참고했다. 매주 한 번씩 규칙을 읽고 생각했다. 그 제목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리고 그것 이상으로 더욱 더 마음을 집중하여 성서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갰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저는 지난 16개월간에 신구약성서를 두 번이나 다 읽었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가 때를 따라 음식물을 섭취하고 목마를 때 음료수를 마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끊임없이 통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면 멀지 않아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잎도 시드는 일이 없을 것이며 제가 이루고자 하는 뜻도 이뤄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와 같이 심령상의 양식을 얻을 것에 고심했던 그녀는 극기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생활비를 생략하려고 한다든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주 1회 단식하고, 또 조반에 버터를 사용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이것도 역시 심령에 은혜를 얻기 위해서이지 딴 뜻은 없었다.

 

당시,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일찍부터 열심히 하나님께 봉사하던 부친이 점점 신앙을 상실하여, 전혀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모친도 그녀도 부친 일을 걱정하며 모녀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적도 있었다. 그 때의 고통을 그녀가 일기에 기재하고 있다.

 

사랑하는 부친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때때로 고민을 많이 했다.

 

하나님,

저의 사랑하는 주님이시여!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부친을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하시옵소서!

일찍이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하며,

성도들에게 구원을 설득하신 그 입술로서

멸망의 비탄을 고하는 입술이 되지 않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요?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어떻게 해서라도

부친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더욱 더 선한 길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저의 몸이 희생되어야

아버지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저를 이 세상에서 불러가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주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는 용사로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진실한 용기와 자유를 주시옵소서!

 

제가 아버님에게 글을 쓸 때,

아버님의 심령에 감동이 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저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Catherine Mumford 양이 아버님을 구원하는 일로 얼마나 심통하게 고려했던가를 헤아릴 수가 있다. 캐서린은 자기 자신이 희생한다고 한들 아버님만은 재차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도해도 용이하게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 캐서린은 믿음으로 기도를 계속했다. 하나님은 나이어린 딸이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자기 아버님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그 음성을 못들은 척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주야로 쉬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오래 견디시도록 하시지 않고 응답하신다. 라는 간증을 듣지 않았는가? 주야로 아버님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던 딸이 인도하는 집회에 아버님이 오랜만에 참석하여 하나님 아버지 품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로 인해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던 성도들은 당시 Mumford 양이 울며 기뻐하는 광경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이후 캐서린은 아버님이 편안하게 만년을 지내실 수 있도록 섬겼다.

 

Mumford 양은, 16살 때 즉 구원을 받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이였으나, 장래 자신과 함께할 파트너 대한 희망과 이상형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그 남자가 완전한 사람일 것.

2.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나아가 엄정한 금주가 일 것.

3. 진리의 도리를 아는 사람.

4. 전도자일 것

 

그런데 그녀가 22세 되던 1851년에 16살적부터 마음에 희망과 이상형으로 품고 있었던 인물을 6년 만에 돌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1852328(주일) 어머니와 함께 평상시와 같이 Stockwell New Chapel 집회에 참석했다. 그 날 집회에서 설교한 인물은 다른 설교자와 크게 달랐다. 그녀는 설교자에 대하여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그 사람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 청년 설교자는 설교를 이론적으로 전하지 않았으나 청중의 마음에 말씀이 와 닫도록 감동적으로 선포했다.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힘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이 가득 차 있었다.

 

윌리엄 부스가 감리교 개혁파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뒤에서 힘써주고 권유했던 사람은 하프 크라운 경화를 빌려 제화공장을 시작한 래비츠씨는 당시 90명의 남자직원과 85명의 여자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Rabbits 씨는 윌워즈 웨슬리 예배당 (Walworth Wesleyan Chapel) 현재 캠버웰 도로 남쪽 코너에 위치에 있는 클럽랜드 교회(Clubland)에서 전당포 도제의 신분으로 일하며 가로에서 생명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윌리엄 부스의 메시지를 들고 은혜를 받고 감탄했다.

 

래비츠 씨는 집회가 마치자마자 강단 계단 앞까지 찾아가서 윌리엄 부스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나눈 후 윌리엄을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초청했다. 크로스비 로우(Crosby Row)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4층 붉은 벽돌로 건축된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현재는 브라우닝 스트리트 코너에 위치한 월워스 로드 199번지) 최초의 건물은 1986년도에 붕괴되었으나 당시 부유하게 제화업을 했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어느 주일날 윌리엄 부스는 감리교 개혁파 빈필드 하우스(Binfield House)에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는 예수님이시다.’라는 말씀을 선포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의 성경 공부반의 인도하고 있던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도 이 집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에드워드 H. 래비츠의 요구에 따라 사려 깊은 윌리엄 부스의 설교를 평가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에드워드 H. 래비츠에게 윌리엄의 설교를 평가해주었다. 그녀는 Binfield House에서 듣던 설교가운데 최고의 설교였다고 전달하자 에드워드 H. 래비츠는 감리교 개혁파 전도자들에게 그녀의 의견을 전달했다.

 

래비츠 씨는 2주 후 크로스비 로우(Crosby Row)에서 다시 한 번 감리교 개혁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특별히 캐서린 멈포드 양과 그녀의 모친 그리고 윌리엄 부스도 초대를 받았다. 윌리엄이 도착할 때 즈음하여 준비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즉석에서 에드워드 H. 래비츠는 윌리엄 부스에게 미국 절제 시인 그로그셀러의 꿈(The Grogseller’s Dream)'을 낭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윌리엄 부스는 900자에 달하는 독한 술에 관한 내용을 황금음성(golden voice)으로 낭송하기 시작했다. 캐서린 멈포드는 라벤다 실크 드레스와 진한 벨벳 재킷을 입었고 라벤더 보넷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흑색 헤어스타일 아래로 찬성의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녀와의 토론 중에 윌리엄 부스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의 회색 눈동자는 짖은 안개 속에서도 밝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곳에서 정식으로 소개받은 청년 설교자는 William Booth 이었다. 그는 그녀와 동년배이었다. 동년배라 하는 것보다는 그녀보다 3개월 정도 뒤에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날 밤, 그들은 여러 가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청년 설교자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은 그분도 자신과 같이 열성적인 금주 캠페인을 하는 즉 한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나 자신이 열심히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흥미가 있을 것이다. 역시 같은 목적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매우 기쁘고 피차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로부터 캐서린 멈포드는 웅변 전문가의 모든 예배참석을 위한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래비츠 씨 역시 윌리엄 부스가 아무런 지체됨이 없이 전임 설교자가 되어야 함을 확신했다. 윌리엄 역시 비즈니스 삶을 빨리 접고 복음 전파에 힘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만 갔다. 윌리엄 부스를 돕기 위해 래비츠 씨는 생활비로 3개월 동안 주당 20실링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윌리엄 부스는 즉시 그의 비즈니스 삶을 접고 새로운 삶을 위한 세팅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185248일 목요일 그는 전당포 도제의 일을 마치고 빈필드 하우스에서 정식으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0 센티미터의 키에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윌리엄 부스는 프린세스 로우 11번지(11 Princes Row)에서 숙소를 찾았다 (나중에 샬롯 플레이스(Chalotte Place), 현재 12 McLoed Street, Walworth Road) 이 숙소에는 40살의 과부 마가렛 월리스 (Margaret Wallis)와 그녀의 여동생을 돌봐주며 보넷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자신의 딸과 이름이 같은 헬렌(Helen)이 있었다. 윌리스 부인은 그녀 집의 일부분을 세를 놓는 걸 좋아했고 윌리엄 부스는 일주일에 모든 것이 포함된 5실링씩 지불하고 살았다. 이 집은 근방에서 조용하고 건축 된지 10년 정도 되었기에 깨끗했으며 몇 야드를 지나면 헤르네(Herne)와 엘리펀트 캐슬(Elephant and Castle)을 이어주는 기찻길과 육교도 있었다. 숙소의 주인은 몇 개의 의자와 침대 그리고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다른 필수품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러나 그 집이 래비츠(Edward Harris Rabbits)씨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기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시티로드 밖에 있던 코우퍼 스트리트(Cowper Street)에 있는 한 교실에서 개혁파들은 모임을 가졌다. 윌리엄 부스는 래비츠(Edward Harris Rabbits) 씨와 함께 왔다. 래비츠(Edward Harris Rabbits) 씨는 캐서린에게 그 모임이 끝난 후에도 잠시 동안 남아달라고 요구했고 몇 시간 후 눈이 마주칠 때까지 윌리엄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Crosby Row에서의 우연한 만남의 재회가 이루어지게 되어 이들 사이가 급진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캐서린 멈포드는 최근 몇 년 전 부터 아팠던 일 때문에 몸이 좋질 않았고 예배 끝날 때까지 머무를 수 가 없었다. 윌리엄 부스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게 되었다. 몇 분 후 윌리엄은 브릭스턴으로 가는 마차를 발견하자 마차에 올랐다. 이 순간은 윌리엄 부스와 캐서린 멈포드 둘만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첫 시간이었다. 마차가 덜컥덜컥 6마일이 되는 1800년대 중반 런던의 자갈길을 달리는 동안 둘은 아무대도 신경 쓸 수 없었고 오직 두 사람이 서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의 집이 있는 러셀 스트리트 7번지(7 Russell Street) 에 도착하자 용감한 신사는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의 모친으로 부터 너무 늦었으니 자기 집에서 하루 밤을 묵을 것을 초대 받았다. 이곳에서 사촌의 집은 너무 멀었고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숙소는 짐을 푼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수선 했다. 게다가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의 모친도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열정적인 복음전도에 감탄을 하고 있던 터였다. 윌리엄 부스가 떠난 다음날 아침 1852410(토요일), 그날은 그의 23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풀지 못했던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그의 평생의 일을 찾았다. 그는 미래의 부인을 찾았고 전당포 업에서의 완전 해방되었다. 3개월 동안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삶의 무거운 짐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약 기간이 끝날 때 즈음하여 래비츠(Edward Harris Rabbits)와의 연락은 다시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생계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먹고 자기 위해 그의 가구를 팔아야만 했다.

 

청년 설교자가 또 2, 3주 지난 후 Catherine Mumford가 출석하는 Stockwell New Chapel 교회 담임목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다. 말씀을 선포하던 윌리엄 부스가 청중을 바라보니 회중가운데 있는 Mumford 양이 눈에 들어 왔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 우정 회화를 교환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윌리엄 부스가 신뢰할만한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청년 설교가 역시 그녀를 신임할만한 숙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우정이 깊어지며, 우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존경과 사랑은 플러스 되었다. 벵쿠스 박사는 청년들을 향하여 청년들이여, 만일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가슴에 애정이 넘쳐흐르기 전까지 우정을 쏟지 말라.”고 경솔한 젊은이들의 애정에 대하여 훈계한일이 있었다. 그러나 캐서린 멈포드 양과 윌리엄 부스 사이는 신성한 이해와 애정으로 굳게 연결되어졌다. 그들은 피차 만남을 통하여 서로가 순진하며, 고결하며, 열정적인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품성은 그의 아름다운 점들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즐거워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들어내려는 열성은 우리 구주의 생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의 모든 행동을 아름답게 하고 고상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아니한 자는 사랑을 창작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사랑은 오직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마음에는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된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고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고 성정을 고결케 한다. 이 사랑을 사람의 마음에 품으면 그것이 생애를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정화케 하는 감화를 끼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윌리엄 부스 군과 캐서린 멈포드 양과의 서로 사랑하게된 것은 존경과 감동과의 결과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의 품성은 고결하게 되어갈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회중파(Congregationalism)에 동참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윌리엄 부스는 존 캠프벨(John Campbell) 박사와 목사관에서의 인터뷰를 마친 후 토튼햄 코트 로드에 있는 화이트 필드(Whitefield)의 가건물에서 우선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회중파에서 요구하는 계약서대로 사역을 이행할 수 없었다.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6펜스를 폐병에 걸린 어떤 소녀에게 주고 말았다. 6펜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 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정이 바닥이 났을 때 감리교 개혁파들로부터 스폴딩(Spalding)에서 열리는 순회전도의 의장을 맡아줄 것을 제의 받는다. 링컨셔(Lincoln shire) 빌라에서의 집회, 성경공부, 목회 그리고 약혼녀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와의 조화를 통해 여기서 그의 삶은 완전히 점령당하게 된다. 18개월 후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신파 감리교(Methodist New Connexion)에 동참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불행히도 William BoothCatherine Mumford의 청교도적인 러브레터를 순서대로 정열하기가 어렵다. 일자가 기록되었으나 많은 경우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하루 혹은 한 달씩 분실된 것이 있다. 게다가 이 서신들이 이사를 자주하는 바람에 분실되기 했다. 그러므로 연속적으로 나눈 대화가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2003년 데이빗 M. 베넷사관(David Malcolm Bennett)이 현재까지 찾아내 구세군 창립자들의 서신(The Letters of William and Catherine Booth)”을 정리한 것을 기초로 하면 윌리엄 부스가 보낸 서신 180통과 캐서린 부스가 보낸 서신 167통을 구슬을 끈으로 꿰는 것처럼 연결해 보았다. 특히 1852년도에 구세군 창립자의 연애시절에 보낸 윌리엄 부스가 보낸 11통의 러브레터와 캐서린 멈포드 양이 보낸 4통의 러브레터는 소중한 사랑의 편지이다.

 

당시 윌리엄 부스는 경제적으로 빈궁한 처지에 있었기에 결혼은 생각지도 못할 처지였다. 그는 그 때문에 적지 않게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윌리엄 부스는 1852512Walworth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직하게 그녀에게 글로 써 보냈다.

 

512일자 편지 내용을 읽은 멈포드 양은 윌리엄의 신상을 깊이 생각하며 513일 간절한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캐서린은 재정이 이끌어 가는 가정이란 모든 가치 기준이 돈에 의해 결정되는 가정이고, 프로그램이 중요한 가정은 부모추모식과 가족행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건물이 이끌어 가는 가정은 재테크를 위해 어느 지역에서 몇 평에 사느냐가 매우 중요한 가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으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행복한 가정은 가화만사성이란 그렇듯한 바른 목표를 세워서는 벽에 붙여 놓아서는 안되고 매우 구체적으로 온 가족이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가정의 목표를 세우되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캐서린은 나의 미래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습니다.” 라고 513일자 편지에서 분명히 밝혔다. 이 레터를 통하여 우리는 명백하게 이들의 사역과 약혼 그리고 결혼생활에 하나님을 깊이 개입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 할 수 없고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수 있도록 했다.

 

그 편지 내용 중에

 

우리가 서로가 만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며

당신의 평안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 것일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저의 입장은 편하게 하시려는 생각은

잊어버려 주십시오.

 

저는 마음에 이미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게 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저의 끊임없는 소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녀가 단지 자신의 행복만을 원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구령자가 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으로 두었던 점을 이해 할 수 있다.

 

비전은 미래를 바라보는 힘이 있다. 고난중에서도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비전만이 우리 가정의 미래를 약속해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한 비전은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고 순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헛된 욕심과 욕망으로 가정의 비전을 위장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가운데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안에서 선한 비전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하나님께서 완성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 야곱처럼 그 비전이 이뤄질 때까지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한다면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

 

2,3일 지난 515일에 보낸 편지에

 

저희들의 마음이 한 마음이라면,

이 세상의 부귀와 존귀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당신께서 진실로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신다면 약혼합시다.

 

당신이 이 점을 확신하신다면,

어떤 경우나 사정에도 상관하지 말고

한 마음으로 앞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녀의 기상이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지 않는가?

 

그녀의 마음에는 허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부귀나, 빈곤은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시너지 효과를 이해하고 윌리엄 혼자 하는 일 보다 두 사람이 한 마음 되어 힘을 합했다. 후에 윌리엄 부스는 부인의 노력 없이는 하늘나라를 구축할 수 없다라고 했던 것도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를 확인한 것이다. 남자에게 가장 좋은 하사품의 하나는 宣揚이며, 경건한 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처럼 부부가 생각이 통하여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랑을 베풀었고 존경을 받았다.

 

약혼예식을 마치고 난 521일 신랑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당신이 저를 매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면

이끌수록 저는 당신을 더 존경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저는 당신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하시는 사역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더 동화(同化)된다면

우리의 결합은 더욱 완전하고 신성하게 될 것 입니다.”

 

우리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사랑가운데 살면서

영혼들을 구원하며 살아갑시다."

 

당신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령자로 살아가시는 것이

제 영혼의 최상의 야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기쁨의 햇살이 비췰 때나

폭풍과 싸우게 될 때도

우리는 함께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사역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최상의 축복이며

매우 아름다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끝맺고 있다.

 

이 짧은 말을 통해서도 그녀가 윌리엄 부스로 부터 무엇을 구했던 가를 알 수 있다. 1852515일 저녁 약혼예식 후에 이 두 사람이 기쁨으로 결심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들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며, 꿈 너머 꿈을 이루기 위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의 목적이었다.

 

어느 과학자는 약혼을 인생의 삼대 모험 중에 하나라고 했다. 부부가 일생동안 마음을 같이하고 인생의 목표를 정하여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순탄할 때나 역경 중에라도 항상 변하지 않고 함께 행군하는 자의 결혼은 인생의 축복이다.

 

독일의 문호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과 카타리아(Kartharia Pringsheim)와 교환했던 러브레터나, 영국의 독창적이요 독보적인 대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89)이 엘리자베스 바렛(Elizabeth Barrett Browning)과 교환했던 러브레터가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면,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와 캐서린 멈포드(Catherine Mumford, 1829-1890) 양과의 3년간의 약혼기간 중에 교환했던 서신에서는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약혼 예식 때 교환했던 지환에는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 있었다고 하나, 윌리엄 부스 군과 캐서린 멈포드 양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선혈을 흘리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슴과 가슴에 사랑이 통한 것이다. 그녀는 약혼자이며, 친구이며, 종교자이며, 격려자이며, 또한 동역자였다.

 

청년 윌리엄 부스가 북 잉글랜드에 유숙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런던에 숙소를 정할까? 스스로 결정을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는 서신을 보내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방침을 결정할 것,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행해야만할 것을 충고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온유, 정숙한 부인이었다. 그분을 지도하기 위해서 충고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그분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괴로움을 갖는 것을 자신이 느끼는 것 같이 생각하며, 진실로 그분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점점 높이 예수님께 끌어올리려는 열성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

 

성서와 그밖에 몇 권의 책, , 이나 잉크나 종이 양초 등을 넣어 둘 가방이나 상자를 준비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일인일실을 선택하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조반 때까지, 침실을 공부방으로 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일과로 하는 것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실행하십시오. 다소간의 곤란은 접어 두고 목적을 위해 계속 정진하십시오.

 

캐서린은 윌리엄 부스가 종종 선교 여행할 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경건한 삶과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말씀의 능력을 힘입고 점점 하나님께로 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되도록 힘써 준비하는 삶이되기를 조언했다. 이렇게 세심한 곳까지 그녀는 주의를 기울였다. 또 어느 때에는 설교의 순서를 매주 보내주며 윌리엄 부스의 수호천사처럼 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그들의 모든 것에 한층 더 그녀는 부스의 영성을 생각했다. 그 때문에 기도하며 걱정하고 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캐서린 멈포드 양은 윌리엄 부스 군과 약혼한지 3년이 지난 1855616일 멈포드 양이 출석하는 Surrey에 있는 Stockwell New Chapel인 개혁파 교회(Stockwell Green Congregational Church)에서 담임목사 데이비드 토마스(Rev. David Thomas Dr.)의 주례로 결혼 예식을 올렸다. 하나님은 그들을 현저하게 축복해 주셨다. 35년간의 그들의 생활은 세상에 엄청난 일을 부여했던 것이었다.

 

구세군 사역의 동기는 첫째로 윌리엄 부스의 마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며 다음은 Catherine Booth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참상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Catherine Bramwell Booth, Catherine Booth: The Story of Her Loves. Hodder and Stoughton, 1970.

David Malcolm Bennett, The Letters of William and Catherine Booth. Camp Hill Publications, 2003.

Harold Begbie, The Life of General William Booth: The Founder of The Salvation Army. Vol. 1.

Roger J. Green. Catherine Booth. Baker Books, 1996.

Roy Hattersley. Blood & Fire. Abacus, 1999.

Jone Johnson Lewis. Catherine Booth - A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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