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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해와 치유사역
홍성효 2007-03-05 추천 0 댓글 0 조회 213

인생을 평가하는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인생이란 즐거운 것이며, 최고의 가치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인생을 누릴 권리가 있다. 또 한 부류는 인생이란 괴로운 것이다. 인간에게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훨씬 더 많다. 인생은 재미없는 것이다.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지만 완전하게 양쪽으로 고정된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자기의 상황과 시대적인 배경 등에 따라 평가의 내용이 교차될 수 있다. 인생을 즐겁게 평가하는 쪽에서도 인생에 있어서 괴로움을 인정한다. 반면에 인생을 괴롭게 평가하는 쪽도 때로는 인생이 즐거운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지배적인 생각이 어느 편에 속했느냐가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을 제기하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고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에게 있는 고통과 괴로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직접적인 질문과도 관계된다. 우리는 인간에게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에 관한 물음을 대답하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관심 중에 가장 큰 관심은 행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괴로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질병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건강 생활을 원하며 건강으로 인한 행복을 추구한다. 이 글은 인간에게 있는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다루려 한다. 이 글은 인간에게 왜 고통과 질병이 찾아오는지 인간 이해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의 제반 문제들을 찾아내어 보기로 한다.

 

1. 인간 이해

인간을 이해하는 이론은 너무나 많다. 시대에 따라 발전되는 학문들은 저마다 인간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다. 인간에 관한 질문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 고대철학의 인간 이해

희랍의 철학은 탈레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때의 철학은 자연철학이었다.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인성철학으로 변하였다. 이때부터 희랍철학은 인간의 본질 이해에 관심을 가졌다. 희랍철학의 대표적 철학자 두 사람의 인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영혼은 육체와는 다른 비물질적인 실체이며, 인간이 탄생하기 전에도 계속 존재해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육체는 영혼을 잠깐 담아두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는 비 본래적이요, 상대적이요, 변하는 죽어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불멸의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실재의 세계, 이데아(Idea)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 끊임없는 상승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이 더 중요하고 육체는 아무 가치도 없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론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뛰어 넘어서 인간에게는 영혼과 육체와 마음(Mind)이 있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육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 안에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이 있다. 마음은 영혼 안에 있는 독립적 실체로서 파괴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구성 요소 세 가지 중에서 마음을 가장 가치 있는 요소로 보았다.

 

2) 기독교의 인간 이해

벌코프는 그의 저서 Systematic Theology 에서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인간은 흙 곧 물질적 재료로 창조된 존재이며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우주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으며 그 인간은 본래 의로운 존재였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유하고 하나님의 실체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몸을 입은 육체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타락하였다. 본래 의로운 존재는 이제 죄인이 되어 그 의를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방종으로 치닫고,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매우 제한적이고 약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죽을 때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떠나간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부활할 것이다. 속죄와 구원을 확신을 가진 인간은 부활에 대한 소망도 가진다.

 

한편 성경은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 혼, 육으로 본다. 몸과 영혼으로 구분되었다고 보는 것을 이분설(Dichotomy)이라 하고, 몸 ,혼, 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을 삼분설(Tricho- tomy)이라 한다. 벌코프를 비롯한 개혁 교회는 이분설을 주장하고, 웨슬레안 교회는 삼분설을 주장한다.

 

3) 사회주의의 인간 이해

변증법 철학자 헤겔은 “모든 사람 각자 속에는 빛과 생명이 있다. 인간은 빛의 재산이다. 인간은 반사된 밝음만을 간직하는 흑암의 물체 같은 하나의 빛에 의하여 바쳐진 존재가 아니라 그 자신 속에 있는 연료가 불을 밝히고 스스로 불태우는 불꽃을 가진 불덩어리다”라고 인간관을 밝힌다. 여기서 그의 인간관은 인간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인 개개인 각자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사회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즉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 활동 즉 생산활동을 영위할 때에만이 가치가 있다. 인간은 생산적 존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올바른 생활이란 생산적 생활이다. 인간은 아무런 지배나 강요를 받지 않고 각자가 가지는 능력을 발휘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을 공산주의 유물주의적 인간관이라고 한다.

 

4) 심리학의 인간 이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인간에게 나타나는 어떠한 현상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 속에 숨은 원인들이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람의 정신 속에는 세 가지 구조 - 에고, 이드, 슈퍼에고 - 가 있다. 에고는 외부적 현실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외부세계와 이드 사이를 조정한다. 이드는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충동적인 것이다. 슈퍼에고는 양심과 사회적 규범을 담고 있는 에고의 특수 부분이다. 초자아는 이드를 통제한다. 본능과 충동은 유아기와 소년시절 초기 경험을 통해서 생겨난다.

 

5) 무신론적 인간 이해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적 인간론의 대명제는 “인간이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첫째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은 단순히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인간, 인간존재 전체, 인류전체, 인간의 우주적 본질과의 관계에서 파악된 인간이다. 우주적 인간, 전체 인류만이 완전한 인간이고 진리의 표준이며, 만물의 척도이다.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하늘에 투사하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예배한다. 따라서 인간의 절대자는 그 자신의 본성이다. 신적 본성들의 속성인 사랑, 정의, 지혜 따위도 실은 인류의 객관화된 속성일 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하나님이다.”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곧 자기 의식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곧 자기 지식이라고 한다. 이처럼 포이에르바하가 신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 회복, 즉 인간 본질의 절대적 긍정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무신론을 의미한다.

 

니체는 인간을 문제적인 존재로 보았고 이것을 그의 테마로 삼았다. 그는 인간은 불명료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은 동물이다. 인간이란 미래의 인간의 본래적 인간 즉 인류의 태아(embryo)이다. 인간은 유동적이어서 빚어서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 즉 동물인간은 종래의 아무런 존재 의미도 가지지 않았다. 지상의 존재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므로 고뇌에 대한 대답도 할 수 없다. 다만 기독교가 금욕적 이상을 가지고 고뇌의 무의미성을 해방시키려 하였고 인간의 생명인 권력의지에 나쁜 양심을 부여하였다.

 

현재의 인간은 목표가 아니라 단지 길이요, 에피소드요, 교량이요, 중요한 약속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점이다. 인간은 약속할 수 있도록 허용된 동물이다. 즉 인간은 미래의 일부분이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써 거기에 대답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니체는 발생학적으로 인간을 동물계에서 이탈한 동물로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의 변종이요, 도한 대지의 ‘병’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6)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삼 단계로 구분한다. 첫 단계의 인간은 심미적(審美的)단계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으로 산다. 그리고 자기의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그는 삶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한다. 둘째 단계는 윤리적(倫理的) 단계이다. 이 단계의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자기의 실존 속에서 보편적인 윤리혼에 따라 선악간에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셋째 단계는 종교적(宗敎的)단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윤리적 단계에 머무르고 만다. 그러나 삶을 뜻 깊게 가지고 가치 있게 하려면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지만 종교적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종교적 단계로의 도약은 개인의 주체성에 의한 결단을 필요로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의 특징은 주체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진리는 언제든지 주체성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죄책에 대한 양심을 가진 현-존재로 본다.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자기와 실재 상호 간에 현실적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자기 자신 못지 않게 현실적으로 보이며, 그것을 자기 자신 못지않게 신중하게 취급하는 데에서만 인간 생활의 절대적인 의의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가 의미하는 본래적인 현-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의 목적인 자아 존재로서의 인간은 현실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인간 자기 자신과의 교섭 속에서만 현실생활을 알게 되는 인간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의 자아는 폐쇄적 체계이다. 인간은 세계와 이웃과 더불어 살려고 지향하지만 그 어디에서나 현-존재가 본질적이므로 그는 혼자이다. 혼자인 인간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쌓일 수 밖에 없다. 그의 인간이해는 무신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들이 옳고 그를 수 있으므로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인간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 결정이 곧 자유이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움에 부딪혀도 마지막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아무리 불안과 공포에 있어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예견할 수 없을 때 불안하다. 샤르트르는 자유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자유를 방해하거나 악화시키는 것은 거부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신과 인간의 자유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신이라는 존재 대신 인간의 자유를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 놓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7) 사회 심리학적 인간 이해

스키너는 인간 본질에 관한 진정한 이론에 도달하려면 인간 행동에 대한 경험적 연구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는 심리학을 “행동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고, 심리학은환경의 영향을 직접 행동과 연결시켜주는 법칙에 한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행동은 어떠한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이러한 법칙들이 인간 행동과 인과적 관계를 밝혀준다. 예를 들어 인간이 언어를 습득할 때 주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의 언어학습은 오직 인간의 환경에서 오는 일련의 복잡한 강화에 의해서이다. 스키너의 이론에 따르자면 인간은 환경에 의해 경험된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존재이다. 스키너의 이론은 마르크스와도 흡사하다. 그러난 샤르트르와는 반대로 인간은 결정되어 있지만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8) 유전학적 인간 이해

다윈은 인간은 유인원류에서 진화된 존재로 본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 가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①인간과 고등 동물과의 구조상의 유사성 ②태생학(胎生學)적 논증 ③퇴화 기관으로부터의 논증 ④혈액 검사에 근거한 논증 ⑤고생물학적 논증이 그것들인데 이 논증들 가운데 어느 것도 소기의 증명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생태과학자 로렌쯔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된 동물의 하나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 양태가 기본적으로 동물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환상으로 본다. 인간은 동물처럼 모든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으로 진화된 것은 지상 최고의 성취 결과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동족을 향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생득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갈등과 전쟁은 타고난 공격성 때문이다. 인간은 개인적 공격성 보다는 집단적인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래 잔존하는 것은 가장 잘 뭉친 집단이다. 인간은 흥분하여 공격적이 되면 모든 이성과 도덕적 절제를 잃어버리는 ‘호전적 열광’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9) 현대신학자들의 인간 이해

칼 바르트의 인간관은 침울하다. 사람은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죄인이다. 죄는 실제로 인간 생활에 있어서 힘을 발휘하여 사람을 지배한다. 죄가 사람의 실존적 삶을 좌우한다.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타락 후에도 형상은 존속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신다.

 

바르트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검토하였다. 첫째로 인간은 선을 위해서는 무능하다. 인간은 근원적 죄 때문에 선악을 구별할 수 없고, 선을 향해 움직일 수 없다. 둘째로 인간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이므로 제한되어 있다. 세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인간관의 성립도 불가능하다. 네째로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 대상이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으로 들려지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의 인간 이해는 실존적이며 그리스도론 적이다.

 

라인홀드 니버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자유라고 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가 모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호성 때문에 인간은 불안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간은 자아의 한계선을 넘어서 볼 수 있으므로 자아의 유한성을 인식한다. 인간에게 있는 죄는 육욕이며 교만이다. 인간은 모두 타락하였으므로 죄는 보편적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죄책 때문에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니버는 인간에게 있는 죄를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죄는 인류 역사를 오염시켜 나가는 요인이다. 니이버의 사상은 하이데거와 바르트의 사상을 미국적으로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은 고립하여 살 수 없는 존재이므로 주변의 환경들과 비교할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고 본다. 인간을 동물과 비교하면 생물학적으로 하나의 불완전한 생물이지만 동시에 문화를 창조하는 생물이다.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인간은 문화의 창조자요 제작품으로 본다. 인간을 신성과 비교하면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세게는 창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초월적인 하나님과 내재적인 세계와의 매개자가 되도록 초청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성취하는 곳은 인자의 왕국에서이다. 인자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켰다. 인자의 나라는 가난한 자, 죄수, 굶주리는 자, 죄지은 자의 보이지 않는 우애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인자는 현실 생활에서 소외된 인간에게 십자가와 부활로 희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인간관은 기독교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정치적 희망을 지닌 인간이다.

 

판넨베르그는 인간은 이 세계속에 머물러 있으나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로 본다. 인간은 자기의 아집 때문에 세계 개방성과 충돌한다. 이것이 죄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뛰어 넘어서 신을 향해 부단히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그의 목표, 즉 신과의 공동성을 향하는 도중에 있다. 인간은 그의 초월적인 목표에 맞추어 살아가면서 모든 지상적인 것을 넘어서 거듭 무한한 신에게 최후의 신뢰를 두고 그의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감사함으로 겸손히 신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래에 대한 성취를 지향하는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 역사의식은 서구 유럽을 통해 현대에 까지 전달되었다. 현대에는 전 세계와 전 인류가 공동으로 역사의식을 가지고 통일성을 추구한다. 세계와 역사의 통일성은 이스라엘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역사의 통일성 속에서 개인은 자기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통일성에 순응하는 통일적 형태를 얻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운명에 근거를 둔, 있는 대로의 역사의 통일성을 향한 시선은, 각 개인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통일성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삶의 전체성을 얻도록 능력을 제공한다. 판넨베르그의 인간관은 역사 지향적이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가며 동시에 순응한다. 인간은 그 자체가 역사라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인간이해에 관하여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기독교로부터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실존론적인 면에서부터 생물학적인 부분에까지, 인간의 구성요소로부터 인간 의식에 이르기까지를 살펴 보았다. 우리는 이제 결론에 이르려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 곧 죄 때문이다. 죄 때문에 인간은 불안과 고통 그리고 괴로움 가운데 있다. 그리고 질병이라는 병리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편 인간은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 노력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인간은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질병을 치료하는 일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치유를 고찰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2. 치유사역

치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질병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질병의 문제는 인간의 유한성과도 직결된다. 때문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사람들의 관심도 각별하다. 이 관심은 다양한 형태의 치료법을 개발해 왔다. 우리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신앙의 토대 위에서 치유를 고찰할 것이다.

 

1) 치유의 개념

치유(Healing)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육체적인 치유를 말하지만 요즈음에 와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정신 상태의 회복, 혹은 깨어진 관계의 개선 - 예를 들어 결혼 관계 - 과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그것은 한 공동체 내에서의 분열의 종식이나 그와 유사한 일체감의 회복이라는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영어의 치유(Healing)는 앵글로 색슨어의 형용사 hāl 에서 파생한 것인데, 본래 병사가 전투에서 ‘온전하게(whole)’, ‘안전하게(safe)’, 혹은 ‘건강한 몸(sound)’으로’ 돌아왔다고 할 대 쓰이던 형용사였다. 그런데 후에 중세 영어에서는 ‘온전한(whole)’ 혹은 ‘건전한(sound)’이라는 의미로 신체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치유(healing)라는 말은 신체의 건전함을 회복시켜 준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대 영어에 와서 ‘건강하게 한다(health)’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명수는 치유의 개념을 회복에 덧붙여 구원으로 본다. 독일어 Heil은 구원과 건강 그리고 치유를 뜻한다. 라틴어의 구원이라는 단어 salus는 건강을 동시에 의미한다. 신약성서의 구원이라는 단어 σώζειν은 치유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인간을 치유하는 것은 개인 구원이고 사회를 치유하는 것은 사회구원이다. 하나님은 어떤 질병이든지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이다.

 

“치유는 회복이며, 화해이며, 조화이며, 전체성이며 또한 구원이다. 치유는 병리적 상태에서 생리적 상태에로의 회복이며, 창조 당시의 사회적 질서와 규율에로의 회복이다. 치유는 자연과 이웃과 환경과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치유는 인간의 구성 요소들, 자연, 하나님 사이의 조화이다. 치유는 온전함, 건강, 그리고 생명이다.”

 

치유는 질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건강으로의 회복을 그 목표로 한다. 질병은 웹스터(Webster)사전에 의하면 “평안함이 결여된 상태, 혹은 건강의 부조리를 경험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평안함이 결여된 상태란 주로 정신적 상태에 관한 것으로서 예를 들어 불안감, 근심, 공포, 절망, 분노, 질투, 적개심, 원한 등을 말한다. 건강의 부조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주로 신체적 상태에 관한 것으로서 예를 들어 생명력과 부패력, 저항력과 파괴력, 음과 양의 평형이 깨어져서 무생명 및 비활동성으로 전락되어 정상 기능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이다. 질병이란 인간 개인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사회가 정상 상태로부터 이탈한 사회 부조리를 포함시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질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사탄의 행위의 결과로 설명된다. 포괄적으로 말하여 질병이란 자아와 인간과 환경과 신과의 부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인간을 몸과 영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전인으로 볼 때, 어느 한 부분만의 - 예를 들어 육체적 질병, 정신적 질병, 영적 질병, 사회적 질병 등 - 병리현상으로 보는 순수한 질병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처음 시작과 그 진행 과정에 있어서 정도와 범위가 다소 연관되어 있다.

 

건강은 질병이 회복되어 정상적인 상태를 뜻한다. 톰슨(W. A. R. Thomson)의 콘사이스 의학사전(Concise Medical Dictionary)에는 “질병으로부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한 상태, 즉 신체 기능이 모든 면에서 최적의 효율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건강은 “모든 기관이 순탄하고 조용하게 제 기능을 수행하는 동안에 갖는 신체적 양호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이다. 이명수는 건강 개념을 확대하여 해석한다. 건강은 자신, 이웃, 환경, 하나님과의 화해된 상태를 뜻하며 온전함, 구원, 생명의 상태이다.

 

“건강은 평형을 회복한 상태이다. 건강은 조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건강은 화해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건강은 회복된 평형, 회복된 균형, 그리고 정신적인 신체성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인하는 세력들에 지속적이며 용감하게 맞싸우는 것이 기독교적인 이해이다. 가장 완전한 의미로 건강은 질병과 무능력으로부터 건전한 상태와 자유를 느끼면서 가장 풍성하게 생명의 잠재력을 향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 인격의 구원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 즉 가장 풍성한 삶, 끝없는 생명,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의 생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치유의 대상

치유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질병, 무지, 가난이 항상 악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에, 사회라는 개념은 인간 공동체, 환경, 자연이 포함되어져야 한다. 인간 삶의 모든 면들이 똑같이 취급되어지지 않는다면 완전한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 질병은 그 상호관계가 있으므로 어느 하나가 고쳐졌다고 해서 치유되었다고 볼 수 없다. 육체적 질병, 마음의 질병, 정신적 질병, 영적 질병, 사회적 질병들이 모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유에 사용될 수 있는 인간과 물질적 자원들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는 어느 한 계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 치유의 첫번쩨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 원칙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치유사역의 모델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사역 중에서 35번이나 직접적인 치유의 사역을 행하셨다.

 

치유의 대상은 죄인 된 인간이어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결과로 인간은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즉 영적 상태는 육체의 질병을 야기 시킨다. 그러므로 치유는 타락하여 사탄의 종 된 인간에게 자유 함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성경은 귀신이 인간에게 질병을 가져다줌을 말한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냄을 인하여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깨끗하게 하셨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귀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귀신이 가져다주는 질병에서 치유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자의 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서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리고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영적인 치유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개인구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치유의 대상은 타락한 사회 환경이다. 사탄은 인간의 세계를 더럽혔다. 인간의 마음속에 욕심을 넣어 주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싸우게 하였다.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다.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부한 자와 힘 있는 자만이 세상을 활개 치며 살 수 있고, 힘없고 약한 사람은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되었다. 치유는 인간에게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 이로서 사회의 모순된 구조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개인이 많이 사는 사회는 구조적 모순이 적으며 평등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힘쓴다. 이를 사회구원이라 말할 수 있다.

 

3) 치유의 목표

치유의 대상들이 바로 치유될 때 치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치유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지배하는 나라로 바꾸어 가는 일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축출하고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증명하셨다. 에수님의 치유는 사탄의 패주이며 포로된 자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었다.

 

이 나라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나라이다. 인간이 치유되고 사회가 치유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양자(兩者)가 모두 치유되고, 구원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곳은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21:4)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그 날에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모습이다. 치유사역은 최후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사역이다.

 

4) 치유의 단계

치유에는 네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증상을 완화하는 것으로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의사의 임무가 부여된다. 이것은 치유의 시작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질병을 퇴치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우리의 목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은 약물 치료와 외과적 수술에 의한 치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질병의 과정으로 손상된 인간의 육체의 구조와 기능, 그 조화를 회복시키는 단계이다. 네 번째 단계는 인격 전체의 온전한 목적을 성취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창조된 목적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그가 온 마음과 뜻과 힘을 합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하나님을 받들지 않는다면 결코 완전히 치유될 수 없다.

 

한편 스탠져(F. B. Stanger)는 치유의 단계로서 여섯 가지를 제안한다. 첫 단계는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 자세를 갖는 일이다. 몽의 긴장이 풀이고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치유사역에만 집중해야 한다. 둘째 단계는 죄악된 상태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정화(淨化)이다. 세 번째 단계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는 단계이다. 치유가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네 번째 단계는 헌신의 단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기대에 찬 믿음의 단계이다. 선입견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항상 기대에 차 있어야 한다. 여섯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치유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치유 능력이 자신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5) 치유 방법론

앞서서 말하였듯이 치유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인간을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기본적인 통합체 즉 전인의 차원으로 보셨고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서 질병의 치유 방법을 달리 하셨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매우 실제적이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암시적인 대화, 분석적인 대화, 말씀의 힘, 만지심 등 다양하였다. 그분의 치유는 귀신을 쫓아냄, 말씀으로 명령하심, 안수, 기도, 환자와 친척들의 기도 및 믿음 등 때에 따라서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그분은 치료에 있어서도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기적적인 치유였다.

 

치유사역에 있어서 사람들이 해야 할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치유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역에 속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힘써야 할 부분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치유를 위해서 사람이 노력할 부분이 반드시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을 위해서 조성해야 할 환경과 개인적인 노력 등이 집중되어야 한다. 치유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하므로 치유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치유가 나타났을 때 인간의 행위가 드러나면 안 되며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제 사람이 치유 사역을 위해 힘써야 할 일들을 열거하기로 한다. 치유를 위해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최초의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성경 야고보서 5:14,15에서는 우리에게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말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 구절에는 병든 자를 위한 기도의 원칙이 담겨 있다. 그 원칙이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주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일이다. 세 째로 주님의 성품에 의지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하나님에 간구하는 데는 주님의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주님의 뜻이 치유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질병제거제이다. 어린아이처럼 신실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며 기도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돌보심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체와 건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치유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의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다양하다. 이 은사들을 치유를 위해 사용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이것을 팀 사역(Team Ministry)이라 말할 수 있다. 팀 사역이란 “각자가 한 부분씩을 담당하되 전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독특한 중요성을 지니면서 전체 일에 능률에 종속되어 있는 여러 사람의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병은 몸의 병, 마음의 병, 영의 병, 사회의 병 등 어떤 형태의 병이든지 상관관계가 있고 이 병들을 유발시키는 원인들이 상호 작용을 하므로 치유는 이 병들을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치유 사역에 동원시킬 수 있는 각각의 은사가 치유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총동원되어야 한다. 치유사역을 행할 때에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영적인 치료를 하는 목회자가 필요하고 신체적인 손상을 치료해 주는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신적인 상처나 아픔을 치료해 주는 상담자와 어려운 여건과 사회적인 부분을 치료해 주는 사회사업가가 다 함께 모여서 팀 사역을 하게 될 때에 환자에 대한 총체적인 치유(Total Healing)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팀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환자들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다. 이는 신경증 등 정신병적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대한 치유대책이다. 치유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험이 교육과 훈련의 과제이다. 교육은 개인의 감정을 재정립시킨다. 교육은 자기 행동에 대한 영향을 분명히 하도록 평가하게 한다. 교육은 보상을 주는 행동을 하도록 시도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교육은 치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교육과 훈련의 방법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공부이다. 적절한 성경공부를 통해서 환자는 무의식에 억압된 죄의식이 드러나고 분노를 표출하는 등 자신의 질병의 원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말씀의 나눔을 통하여 긴장을 완화시키고 자기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말씀의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네 번째로는 상담을 통한 치유이다. 상담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통하여 내담자의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치유상담은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알려서 그분을 의지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상담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이웃과의 화해를 이룸으로 그들의 내적인 질병들이 치유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담은 성경중심이며 성령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공동체 생활을 통한 치유이다. 이 공동체는 주님의 공동체 즉 교회를 가리킨다. 치유의 은사는 성령께서 초대 교회에 내려 주신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삶들이 전인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해 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사도 시대와 그 이후의 교회 시대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정기적으로 치유 사역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치유는 초대교회 시대에만 존재했다고 볼 수 없다. 교회가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듯이 치유 역시 세상 끝날 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치유의 사역이 한 시대에만 행하여지고 종결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생각이며 믿음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치유하는 공동체이다. 치유는 교회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행해야 할 복음 선포의 한 부분이다. 복음이 구원의 선포라면 치유는 복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주님은 이 복음을 선포하라고 교회에게 사명을 주셨다. 교회공동체는 치유를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기도, 성경공부, 상담 그리고 팀 사역 등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공동체의 교제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돌봄의 사역을 통해 치유 사역을 행할 수 있다. 교회는 교제를 통해 상처 난 육체와 영혼, 깨어진 삶, 가정, 사회, 세계를 위한 메시지와 권능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든 자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통하여 외로움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새로운 희망이 싹틈으로서 슬픔이 치유된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달음으로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된다. 이러한 일들이 예배를 통하여 일어난다. 예배 때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의 위엄과 권능과 지혜와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예배가 진행되며 점점 하나님께 몰두하게 된다. 예배의 모든 순서들 예를 들어 기도, 성경말씀, 찬송, 설교 등이 치유의 능력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출 15:26)이 세우신 전인적인 치유를 행할 수 있으며 마땅히 행해야 할 치유 공동체이다.

교회가 치유사역을 적절히 그리고 활발하게 행할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목회자가 치유 사역을 행함으로써 지 교회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교회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자들은 목회자를 신뢰하고 목회자를 따라 신앙 성숙과 교회 성장을 위해 힘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치유 목회는 교회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야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찾아 그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 주는 치유 목회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치유가 행해질 때 신자들은 교회로 모이는 것을 즐거워 할 것이며 교회는 점점 더 성장해 간다. 교회를 통한 치유는 세상 밖으로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여섯째는 전술한 모든 치유 사역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치유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이다. 사탄은 지금도 자기의 영역 확대를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싸움을 걸어온다.(벧전 4:8 참조) 사탄은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살인자이다.(요8:44 참조) 이러한 사탄과의 싸움에서의 승리하고 생명을 얻는 일은 필연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치유와 구원의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성령의 역할을 배제한 모든 치유 사역은 인위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궁극적인 치유사역이 되지 못한다. 그 치유는 다시 재발하여 인간은 치명적으로 병들게 하는 일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치유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성령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이다(에베소서 6:10-20 참조).

 

이상과 같이 인간 이해와 치유 사역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관점이 있다. 인간을 단순히 정신적인 관점에서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는 인간관, 물질적 관점에서 보는 무신론적 인간관, 자신의 존재 근거를 파악하는 실존론적 인간관, 이웃과 사회와의 싸움을 하는 공격적 인간관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의 존재 근거를 인간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질병과 사회의 부조리를 보는 관점도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지극히 편협하며 제한적이다. 이러한 인간관 속에서 바람직한 치유 사역이 행하여질 수 없다. 바람직한 치유 사역은 곡 기독교적 인간관의 전제 위에 있어야 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죄인 된 인간이다. 그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혹은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물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치유 사역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악 속에 놓여져 있으며 질병의 공포 가운데 살아간다. 질병이란 곧 하나님과 파괴된 질서이며 자신과 환경 그리고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 곧 부조화이다. 인간이 가진 질병은 몸의 병, 정신적인 병, 영의 병, 사회적인 질병이 있다. 이 질병들은 어느 하나 만의 질병이 아니라 이 아니라 상호 연관 관계에 있다. 건강은 질병과의 반대 개념으로서 하나님과의 회복 그리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환경과의 조화를 의미한다.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곧 치유이다.

 

치유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치유 사역을 행하신 것을 모델로 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치유 사역을 행해야 한다. 치유의 대상은 어떤 한 부류만 될 수 없다. 질병이 총체적이듯이 치유도 총체적이 되어야 한다. 치유의 대상과 방법을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하면 안 된다. 병자의 영적인 상태, 병든 부분 그리고 질병의 증상 등에 따라 적절한 치유 사역을 행해야 한다. 이 치유 사역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치유는 인간의 행위에 국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뜻에 의지하는 사역을 행해야 한다. 교회의 치유사역은 곧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구원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는 치유 공동체로서 그리고 복음사역을 위임 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과 치유 사역을 행해 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며,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대망하는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이 된 신자들은 치유 사역이 교회의 복음 선포와 구원사역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각자가 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여 치유를 위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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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글 결혼준비 핸드북 1 홍성효 2007.03.05 0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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