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령의 모놀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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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나라는 사람은 . . .
김소인 2008-03-10 추천 0 댓글 1 조회 1968

오늘, 나는 내 신앙발상 지속과 관련한 됨됨이를 좀 진솔하게 짚어보려 한다. 하기에 이는 어느 대상을 놓고 비아냥 내지 빗대어 펴는 논지가 결코 아니므로 우선은 부디 오해없기 바란다. 따라서 사람마다 인식사유 역시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니 비난이나 조롱 또한 안했으면 좋겠다. 다만, <향령의 모놀로그(monologue)>가 지닌 그 본래 뜻 그 자체로 인정하고 넉넉히 소화해 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나는 본디부터 성결 된 반열에 끼이기는커녕 도무지 그 근접조차 않은 그 정도로 허물투성이 잔뜩 들어찬 볼썽사나운 딱한 존재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내겐 남들처럼 심심산간의 기독교절간 즉 기도원 같은데 찾아가 몇 끼니씩 금식하기와 밤 지새워 기도드린 가운데 홀연히 무슨 신비경지를 접했다거나, 아니면 이적기사 행하는데 몹시 소문난 어떤 부흥사 인도하에 요란하고 열띤 박수장단 치며 열린 대 집회 그것도 거룩하다고 구획지어 놓은 연단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가 온 몸 뜨거워졌다는 그런 체험이란 아예 깡그리 없다.

 

그래서인가, 나는 어쩌다 <성별>이니 <경건>이니 하는 그런 속세 절연한 소리만 멀리서 들려와도 이내 닭살이 돋고 만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게도 가슴 깊은 한쪽 말미에 드센 새 불꽃이 지피어 활활 타올라 크게 일었던 그 경이로운 내력을 분명 갖고 있다. 한데, 그 장소는 공교롭게 구세군사관학교 화장실 사기변기의 오물을 한참 땀 흘려 닦아내던 그 더러운 자리였다.

 

지금의 이 내 진술은, 이미 2005년 11월호 <사관/士官>지에 게재한바 부분내용 그대로이거니와, 작업용 고무장갑 없던 시절 당시 김석태 교감님이 맨손아귀 둘레를 볏짚 새끼줄로서 흡사 똬리처럼 휘감아 틀어 매고 추한 분뇨가 진창 고인 재래식 사기변기 속을 거침없이 넣고 찌들어 붙은 때를 제거하려 거듭 벅차게 문대던 그 장면에서 나는 흠칫 대경실색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했다. 고얀 냄새가 퍼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 역겨움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서다. 이는 심리학상에서 논하는 이른바 본능적 <방어기제>였다.

 

결과론적으로, 나의 그 행동은, 곧 인륜지 덕업이란 무엇인지, 선행이란 또 어떤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맥락과 상통한 짓이었다. 어쩌면 기독교 입문 이래, 단 한 차례일지언정 거적 집 애옥살이에다 병들어 누워 신음하는 그런 불우인생에게 찾아가 곁부축 했거나, 가엾은 사람 위하여 잠시나마 허드레 치다꺼리 해준 보살핌이 전무했음을 고스란히 나타낸 그 실증일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단련 안된 내 비위가 자꾸 메스꺼워져 그 자리에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됐었다. 연거푸 헛구역질을 계속 일으켜 옆에의 빈칸 쪽에 얼른 뛰어들어 막 오바이트를 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곧바로 내 등 뒤에서 김석태 교감님 평안도 사투리의 <야, 고러니꺼니 겨우 싹 지워지누만요. 청소는 고저 마음 관리하는 정성만치나 똑 닮아서 힘든기야요!>라는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그 찰라 나는 두어 발짝쯤 떼어 옮기던 걸음새를 이내 정지했다. 그리고선 갑자기 얼어붙은 듯 움죽 않고 옆 칸 문고리 죔쇠 잡은 그대로인 채 서서, <옳거니, 그렇구나!>를 연방 되뇌었었다. 그러면서 참으로 예상사가 아닌 성령 강림의 소나기를 흠뻑 맞고 있었다.

        

흔히들, 무릇 성서적인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증험의 현장을 대라면 어느 누구나 대뜸 세속과 구별된 신성지를 가리키기 일쑤다. 그러나 내 경우엔 그와는 상반이었다. 왠지 그랬다. 그건 아마도 순전히 내 냉철한 비판의식 기질 작용탓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결국 그 같은 연유로 해서, 난 무조건 열성적 맹신자 그들처럼 툭하면 성서구절을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 해석했다든지 혹은 나 홀로만 선택된 듯이 마냥 자아도취경에 빠져 신앙생활한적 없다. 그리하여, 성총(聖寵) 깃든 제복의 양 어께 위 견장이 무한히 짓누르고 무거운줄은 진작 감지해 놨다.  

 

그러한데다가, 평소 내깐엔 불완전한 지식과 모자란 경험을 가진 채 함부로 대중 앞에 나서서 교설한다는 그 것은 곧 위선과의 내통자라고 여겨 왔다. 그런 까닭에, 걸핏하면 흡사 훈련 잘 받은 앵무새 입버릇이듯 잇따라 <영혼구원, 은혜충만, 성령받아라, 믿습니까, 기적이 일어난다, 축원하노라, 할렐루야, 아멘> 타령일색 따위로서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일체의 전권을 넘겨받은 특사인양 거들먹거리며 신앙집회를 이끌어가지 아니했다.

 

또한, 시골 5일장에 나타난 목쉰 뱀 장수 땅꾼처럼 마이크 꺼내 들고 성전강단 바닥마루 너비가 비좁아라 종횡무진 누비며, <성서진리>를 단 일 매의 초고(草稿/초벌원고)마저 갖춤 없이 무엄하게 한갓 전설적 야사(野史) 늘어놓듯 입담만 가지고서 허세와 픽션(fiction)으로 역설한바도 없다.

 

거기에 더 보태지는 게 있다. 그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하물며 예배드리면서, 뉘우치고 깨닫는데 단상과 단하가 다르지 않다는 그 소신 유지이다. 그러니까, 그 누구이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여 <차한에 부재> 즉, 열외자란 절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강단위의 복음 전달자나, 그 아래쪽 복음 경청자도 다 에누리없이 죄 사함 받을 애처러운 존재이며, 또 구원되어져야할 동일 선상에 놓인 불쌍한 처지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지엄하신 하나님 앞에선 신분상 지위고하 막론하고 너도, 나도, 그도, 모조리 고르며, 균등하다는 그 의미이다.  

 

기실, 난 그 사상을 늘 일관되게 견지 고집해 오고, 또 한사코 크게 강조하는 편에 서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란 인간은 그 언제나 천생 외곬 길로 들어선 고독한 나그네일수 밖에 더 없지만 말이다. 이는 나 스스로 판단해도 참으로 유별나게 군 결과의 증좌라 하겠다.

 

이제 결론이다. 극단적 역설적이나마 내가 진실로 헌신의 도리를 찾은 데는 거룩성 부르짖는 그런 성별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구구절절 자랑할 것은,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차라리 악취 그득 나고 더럽게 찌든 오물 벗겨내 쾌적한 생활환경으로 일신해 놓고자 온 몸 내던졌던 한 크리스천 지도자의 기본 기독정신과 맞부딪힘, 그럼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으로 고동치게 몰아가 마침내 이 미천한 나로하여금 올바른 인간상 지평을 열도록 촉진케 했었니라 그것. 

 

아, 정녕 그렇다. 하기에 이처럼 그 내막 사연을 당당히 그리고 널리 밝혀두고 있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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