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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보다는 <사랑>을!
김소인 2014-10-14 추천 0 댓글 8 조회 1435

          <믿음>보다 <사랑>을!

 

                             <믿음>보다는 <사랑>을!
                                    
                                                  金   素   仁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 표준새번역 신약성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9절,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31절. 누가복음 10장 27절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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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지상(至上)의 대법(大法)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만천하에 천명하신 최고개념의 계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는, 마치 양대 산맥능선인양 두 기조로 나누어져 이 땅에 벋어 내렸습니다. 그 맨 첫째 맥락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바 태도를 가르친 엄수조령이고, 다음 둘째 맥락으로선, 사람과 사람끼리 필연적으로 준수해야 될 유대관계규범요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크고 위대한 의미를 지닌 <사랑>은 초월적 존재, 곧 절대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신 성총(聖寵)의 징표입니다. 그런 까닭에, 굳이 성서상 등장된 여러 선각자 및 고대 철인들 고견을 일일이 들추어대지 아니하여도 그 <사랑>이야말로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이르겠습니다. 따라서 더 설명보태면 그 <사랑>은 본시 불멸불변(不滅不變)입니다. 즉,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또 변하지도 않는 최고류 이법(理法)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은, 온 만유삼라만상 일체의 가치, 그뿐 아니라 또 어느 규범보다도 매우 앞서는 존엄한 개념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로써, 초대 기독교의 대전도자이며 신학자였든 바울 사도는, 그 <사랑>은 어떤 무엇과도 맞대어 비교될 수 없다고 딱 잘라서 논해 놨습니다. 가령,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지식, 예언, 방언, 신비, 기적, 능력, 희생, 소망, 나눔 그리고 믿음까지 끌어들이어도 <사랑>과는 애당초 비견될 수가 없을 정도라며 아예 일축해 치웠던 것입니다. 그 실례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어떤 수리적(數理的) 기하학을 동원할지언정, 도저히 산출해낼 수 없을 그 만큼 심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할 뿐더러 제아무리 굳게 닫친 철옹성의 대문이라 친들 쉬 열리게 하는 마스터 키(master key)라고도 이르겠습니다.

 


그토록 <사랑>은 참됨, 착함, 아름다움을 다 겸비한 <지고/至高>의 그 자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여, 신약성서 요한일서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까지 극대 해석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정도로 <사랑>이란, 매우 고귀한 절댓값 대율(大律)이자 그 법리의 근원원리 즉, 모법(母法)이 됩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오래전인 소시 적에, 저 서두에 명기하여 둔 그 공관복음 성서 몇몇 구절 낱낱을 눈여겨보다가 이해상충에 얽혀졌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숭상하는 그 방도에 있어서 <사랑>으로냐, 아니면 <믿음>으로냐, 그렇게 두 가지 설(說)의 갈래에 직면하여 한동안 관념적으로 헷갈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 점차 내심으로 철들면서, 이른바 <믿음>이라 하기보다 <사랑>이라는 그런 어휘 혹은 낱말로써 대체하여 구사할 것을 작심했습니다. 내경우, 그 <믿음>이라는 어간(語幹)에 스민 여러 상상작용도 시비대상이거니와, 그 어구가 지닌 기본개념정의부터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 까닭 때문입니다.그 무엇보다도 논리적 구체성(具體性)을 갖추지 않은 매우 추상적(抽象的)이며 또 주관적 염원에서 우러나온 용어라고 다정내린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 과제와 깊게 연관된 하나의 학술자료를 내놓습니다. 독일 근대 철학자, 신학자 그리고 목사이던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iermacher 1768-1834)의 이른바 <믿음>부문에 대한 논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믿음>이란, 우리 인간됨의 세 가지 심리적 핵심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 중에서도 주로 <감정>부분 기조에서 쉬이 분출되고 또한 형성된다고 주창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의 그 역설에 전폭 동의합니다. <믿음>의 구성은, 인간 심리분야 속성인 <감정>의 형세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여도 도무지 무리가 아닌 성싶습니다. 그 반사적 뒷받침의 한 실례를 들춰 짚어냅니다. 즉, 이 세상 기독교의 어떤 크고 적은 교회이건, 또 심심산속 어느 불교사찰이건 그리고 시내 무슨 무속당집이건 간에 그곳 출입 무리들은 예외 없이 필경 생물학적으로 정서적 감수성 풍부하게 지닌 여성들이 의지력(意志力) 다소 강인한 남성 측보다는 몇 곱절이나 다수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랴, 특히 한 예로서, 기독교행사를 비롯하여 부흥회 열린 장소마다 가장 맨 먼저 떼를 지어 찾아가 그득 앉았거나, 집회사회자 유도 따라 어느새 금방 흥분 고조되어 어깨노리 마구 들썩이며 장단 맞추듯 손뼉 치는가하면 몰아경지에 흠씬 빠진 그런 기이현상도 거의 여성들이 빚어냅니다. 그 일련의 모두는 <감정>물결동요 심한 여성들의 몫인 셈입니다. 해서, 그 슐라이어마허의 지론(持論)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역시, 그 슐라이어마허는 그 <믿음>의 질적 형태는 인간개체가 품은 염원 유형에 따라 얼마든지 천차만별로 변한다고도 논했던 것입니다. 그 이론은 시대적으로 백여 년이 훨씬 경과한 후이나, 미국 미네소타 주립 종합대학 사회심리학 교수 Leon Festinger의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학설과도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그 유명 연구논문항목에서, 결국 인간이란 <이성적/理性的>이라기보다 <합리화>의 의속(依屬)이 농후한 존재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즉, 각 사람마다 <사고/思考>라는 명제에 <행동/行動>이 붙따르도록 하지를 않고, 이미 <감정이입/感情移入>을 거쳐 저지른 <행동>에다 <사고>가 맞추어지게 <합리화>로 치닫는 실체라고 규명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본말전도기이현상은 시시건건 매사 빈번하게 <믿음>이라는 어휘를 들먹이는 열광적(熱狂的) 신자들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그 부류들은 <선악/善惡>· <진위/眞僞>·<선후/先後>에 대하여 식별하기는커녕, 확실치 않은 사물이나 표상을 그것도 순전히 독선적인데다가 주관적으로 틀림없다며 무턱대고 신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사를 무조건 <믿음>이란 명판을 내세워 해법 찾으려는 그런 경거망동은 엄금인 것입니다. 한낱, 심리적 <감정> 부산물인 <신념>을 놓고서, 무한히 왜곡 또는 과장하여 신앙의 소산 <믿음>이라고 집착함은 그릇된 착각입니다. 그 과제와 필히 연관성 갖는 이야기를 한 가지 더 꺼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구세군만국사관대학에서 재정분야 강론시간에 들은 그 내용골자 일부를 옮깁니다. 세계 어떤 나라의 구세군은 소위 <믿음>을 몹시 자랑삼으며 분수 넘치게 큰 교회를 건축케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비 부족현상이 발생, 결국은 만국본영에 지원요청 겸해 그 보고서를 보내온 적 있다며, 대단히 딱한 노릇이었다라고 부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강사 사관은 신약 누가복음 14장 28절서 30절까지를 직접 봉독해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우리 한국 구세군 동향을 빗댄 지적이거니 여겨지면서 영 고개를 제대로 쳐들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스러워져서 그랬습니다.

 


물론, 사뭇 오래전의 체험담입니다. 그 탓으로 가늠하면, 그 때의 그 일은 이젠 내 뇌리에서 아주 소멸됐을 성부르건만, 난 아직도 전혀 잊지 않고 고대로 생생히 기억하며 지냅니다. 그럴 것은, 그 당시 내 아둔했던 의식바탕에 너무나 호되게 매질해준 강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혹 어디를 향해 가다가 우연히 어느 건축공사의 중지된 그 볼품흉한 현장을 목견하노라면, 대뜸 영국 만국사관대학서 청강한 그 강론을 불현듯 떠올립니다. 저 건물주에게는 예산부족인가, 부도처리 발생했나,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봐, 그렇게 상서롭지 못한 상상이 가는 겁니다.

 


다른 경우 차치하고, <믿음>만을 앞세워 무턱대고 교회건축 시작했다가 낭패 겪은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그 원인은 나변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마치 동화책 속의 도깨비방망이듯, 무조건 휘두르면 소원성취 된다고 여긴 탓에 기인합니다. 그야, 교회활동에서 매사 예산타령이나 하는 따위 풍조쯤은 없애야 함을 모른바 아닙니다. 따라서, 도마(Thomas)처럼 항시 <의문부호> 꺼낸 자는 영락없이 <이단자/異端者>로 낙인찍히기 똑 알맞음도 넉넉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 대목은, 광의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평가해보면 인간 쪽의 무한욕망달성과 사심 채울 보따리 마련 및 요행수 일어나기 바라는 그런 도구인데다가 막연한 형식논리 대상인 데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아니, 진작 식상한 터입니다.

 


아울러, 인간 유기체의 한 기능인 <감정>으로부터 소산된 그 <믿음>에 대하여 또 하나 학설을 더 소개합니다.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미 하버드대학 교수이며 심리학자, 철학자이던 James, William(1842-1910)의 <감정설/感情說>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견을 폈습니다. 즉, "종교상 그 <믿음>이라는 어휘개념은 현실적으로 확실하게 이뤄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인용한 낱말은 아니다. 어려운 우리생활에서 다른 선택여지가 없음으로 불가피하게 끌어들인 목적어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그 용어가 효용이 있다면 진리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라고-.

 


기실은, 못내 어정쩡한 결론입니다. 정녕 그럴진댄, 이번엔 <사랑>에 관하여 잠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그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도 교훈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과 35절에 의하면,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한 그 가르치심에 잠시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그 고귀한 일깨움의 참 의미를 재차 반추 음미하건댄, 이런 덧붙임이 가능해집니다. 즉, 뭇 사람들은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로써 예수 그리스도님의 제자임을 인지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믿음>성이 대단히 도탑거나 뛰어나야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님의 제자임을 안다고 그렇게 언급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랑>을 일궈낼 심성적 바탕만 완비돼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능히 예수 그리스도님의 제자자질 유지 성품은 이미 갖춰졌다는 의미 부여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공생애 시초부터 제자선발에 결격사유가 전무한 그런 특정 완벽주의자들을 찾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설혹, 인격적으로 죄 많고 품성에 흠이 크게 얼룩져 있다손 쳐도 제자 입문을 그들에게 활짝 개방했던 셈이셨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유달리 예수 그리스도님께 향하여 눈길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나 같은 하급 인생 존재조차 한결 숨통 틔고 뭇 사람들 삶 틈에 끼어들 수 있는 게 아닐까 감히 그렇듯 여깁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님에게 때때로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생명 희생으로써 <사랑>의 원형(原形/model)을 이룬 그 성총으로 해서입니다.

 


홀로, 날 저문 갈릴리 해변을 시름겨워 걷기도 하시고 또 동산에 올라 가엾은 민중으로 인하여 마음 아파 우시며 기도하신 구세주 그 분. 창녀를 끌고 와선 돌로 쳐 죽이기를 원하는 무리 향해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 있거든 여기에 어서 나서라!>며, 떨고 선 피고 당사자 가녀린 그 여인에게 긍휼의 시선으로서 살포시 다가 가셨던 그 자애 그득하신 그 분. 병들고 가난한 자들과 자주 만나 따듯이 어울리시는가 하면 상대가 누구이든 청하면 서슴없이 함께 길나선 그 지순하신 그 분. 대수롭지 않은 공중 나는 참새 하나하나 운명과, 들녘에 핀 백합 한 떨기 그것에서도 하나님 섭리를 읽어주신 그 혜안의 그 분. 절망과 참담한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달려 그 생애 종언을 고하는 형장에서조차 무지막지한 만백성 죄 용서를 위해 애절히 갈구하신 그 어지신 그 분!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사랑>이 극진하신 분입니다. 결코 악행만을 가려 저울질하시는 냉엄한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서, 온 인류 중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의 아버지>시라 일컫도록 그 노둣돌 역할을 명료하게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사랑>은 그 어떤 제도에서 발생하는 규범적 <믿음>보다 최고우위를 점유한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이 세상 절대주의와 법률 등등도 초월된다고 거침없이 역설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인식과 입지토대위에서, 제아무리 희망이 미진하고, 웃음마저 메마른 암울한 세태 속에서나마 그래도 용기 가다듬습니다. 환언하면, 더러는 막상 갈만한 데를 못 찾아 심란해하고, 고독하고, 아쉽고, 병들고, 섧고 그리고 억울하게 소외(疏外)당할지라도 여전히 잘 지냅니다. 비록 하치바닥 생활일망정 이처럼 당당히 숨 쉬며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천지 오직 단 한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님에의 그 절대적 <사랑>을 의지하고서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앞서 모든 적요는, 애오라지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허물투성인 나를 극진하게 <사랑>해 주시고, 나 못난 실존 역시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한 결과로 말미암아 고스란히 얻어진 좋은 체득의 실례(實例)라 칩니다.

 


정녕코, 이상은 나 자신도 몸서리나는 온갖 학술계가 쏟아낸 그 사유(思惟)와의 씨름, 게다 별의별 갖가지 신앙노선에 따른 증험과 맞부딪치면서 터득한 주견입니다. 바로 그 연유로 하여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몸소 본보이시며 가르쳐주신 그 <사랑>의 수레바퀴궤적을 곧장 따라 달려가야 옳다고 감히 부르짖기에 이른 것입니다.

무릇, 이쯤 이르러 평소 내 자신의 신앙관에 대하여 단 한마디 부언하고서 지나치려 합니다. 그런데 이는 나로하여금 도리어 화사첨족(畵蛇添足)처럼 군짓거리에 휘말리게 될런지 모르나 그래도 속내를 정직하게 실토하건댄, 결국 <자기모순/自己矛盾>과 함께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잔뜩 불러오는 그깟 사이비성 가미에다 너절한 그 <기복신앙>은 아예 멀찌감치 배격처리다의 입장입니다. <사랑존중> 및 <사랑실천> 그 급부(給付)로써, 반드시 치명적 시달림 아니면 인고(忍苦)의 아픔쯤은 치러야 타당타는 게 내가 지금까지 철두철미 간직한 소신이자 좌우명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외침의향은, 어느 누구나 참다운 크리스천이라고 행세하려거든 특히 성서적 <진리>소유엔 그만큼 <대가>를 고통으로서 선뜻 지불할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 부여이기도 합니다.  

한데, 위의 열거내용과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비판적 주안점이 더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 거의 저마다 툭하면 소위 <믿음>을 앞세우고선 궁극적으로 <공것/空得>만 들입다 거듭 추구함은 너무나 간교성심사(奸巧性心事) 그리고 그 작태라고 지적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이현상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비성서적 극치이거니 여기는 터입니다. 그런즉 허구한 날 아니지, 통상 새벽께 부터 염치도 없이 무조건 <복 주소서> 타령조 따위로 시작하여 진종일 내내 남용하는 그 허드레 도구인 듯싶은 <믿음>이란, 내생활 근본 주행로에선 진작 제2차선에 옮겨 제쳐놔야 했습니다.

 

해서, 이를테면 순도백분비(純度百分比) 황금(黃金)이나 질량 높은 다이아몬드(diamond)평가수준마저 아득히 앞질러 초월한 고차원(高次元)의 그 감동 벅찬 예수 그리스도님 <사랑>파고(波高) 물보라가 이 너른 지구촌 곳곳마다에 파급, 매우 영롱하게 이랑지고도 무척 아름다운 풍치로 그득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 오늘역시 여간만 간절하지 않습니다. 내 딴으로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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