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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건축
운영자 2012-07-26 추천 0 댓글 0 조회 1803

                                             


                                        초대 교회건축 
                          
                       (로마시대의 초기 기독교 건축양식)



초기 기독교 건축은 말 그대로 기독교가 로마사회에 자리잡아가는 초기 과정에 나타난 기독교 건축양식을 일컫는다. 교회사에서는 초대 교회에 해당된다. 기독교 역사는 오래되지만 구약시대 수 천 년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사도들에 의해 전도가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유럽과 소아시아 등 로마 제국 내 여러 곳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바오로의 전도가 눈부셨고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서 로마에서 기독교를 조직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초기 기독교 건축의 성립


초대 교회의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된 의견이 없지만 중세교회 이전까지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예수-바오로-베드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에 의한 프랑크 왕국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내에서도 세분화된 구분이 필요한데 서기 3세기까지의 탄압기, 4세기의 승리기, 5~6세기의 전파기(혹은 확장기), 7~8세기의 침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기독교 건축은 이 가운데 건축 활동이 미미했던 침체기를 제외하고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로마를 필두로 라틴 웨스트, 에게 해 연안과 소아시아, 동방내륙과 아라비아 반도 등에 지어진 기독교 건축을 통칭한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문명에 요구되는 건축양식의 기초가 잡혔다. 이를 바탕으로 중세 때 기독교 건축이 융성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건축은 제1 기독교 건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라-에우로푸스의 가정 교회(House-Church at Dura-Europus) - 시리아. 250년경.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초대교회의 가정 교회 모습이다.

 

 

초대 교회의 세부적 시기 구분은 초기 기독교 건축의 시기 구분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초대 교회의 탄압기는 초기기독교 건축의 형성기에, 승리기는 콘스탄티누스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완성기에, 전파기는 확산기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기독교 건축이라고 부를만한 건축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현재 남아있는 유구를 기준으로 할 때 2~3세기이며 건물 종류로는 가정교회와 카타콤(확장하면 지하 매장시설)이다. 이 시기는 탄압기와 형성기에 해당된다. 4세기의 승리기와 완성기 때에는 바실리카와 무덤교회라는 첫 번째 교회양식 짝이 탄생했다. 확산기 때에는 앞 시기에 완성된 양식이 유럽과 동방 일대로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표준양식이 반복되기도 했고 지역 특성에 맞게 변형되기도 했다.

 

 

가정교회와 카타콤

가정교회와 카타콤은 시기적으로 형성기를 구성하는 짝일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기독교 건축의 두 축을 구성하는 짝이다. 기독교 건축은 집회와 매장을 주요한 두 기능으로 갖는다. 집회는 당연히 미사이다. 매장은 우리나라 기독교 건축에서는 낯선 개념일 수 있는데 서양 가톨릭 교회는 주요 성인들의 무덤을 겸하기 때문에 매장 역시 교회에 요구되는 중요한 기능이다.

 

중세건축으로 넘어 가면서 매장기능은 방사형 채플과 지하 납골당 등으로 정리되면서 교회 건축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데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는 이것의 전 단계로서 매장기능이 건축형식으로 구체화되는 형성과정이 있었다. 형성기 때에는 이런 두 기능에 해당되는 기초적 건축형식이 형성되었다. 가정교회는 집회 기능을, 카타콤은 매장 기능을 각각 담당했다.

 

가정교회는 말 그대로 로마의 주택을 교회로 개조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정교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예로 도무스를 개조해서 지은 두라-에우로푸스의 가정교회(250년경)를 들 수 있다. 도무스의 건축구성은 다행히 기독교의 집회기능에 대응될 소지가 컸다. 중정은 교회의 안마당에, 중심 방은 예배실에, 중심 방의 오른쪽 위쪽 방은 세례실에, 왼쪽 위쪽 방은 예비신도를 위한 학업실 등에 각각 대응되었다. 부엌은 식당에 대응되었다. 세례실에는 벽감과 벽화 등의 장식을 가했다. 벽화에는 가장 오래된 예수상을 비롯해서 성경내용과 예수의 행적 등이 그려져 있다. 예배실은 5미터 x 13미터로 50~60명을 수용했다. 이런 구성은 나중에 바실리카 교회가 등장하면서 일직선으로 펴지기는 하지만 교회의 집회기능을 최초로 건축구성으로 구체화한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교황들의 묘실(Crypt of the Popes) - 로마의 비아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Catacomb of St. Callistus)의 한 장면인데 주요 성인이나 순교자, 그리고 교황의 무덤은 별도의 묘실에 치장을 했다.

 

 

기독교는 부활과 사후 구원을 믿기 때문에 화장보다 매장을 장려했다. 초창기 기독교는 성인이나 순교자처럼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에서 일반 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매장을 담당하는 역할을 겸했다. 그 방향은 둘로 구별할 수 있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대상인 경우로 단순한 매장을 넘어서서 건축적으로 특화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다수의 평신도를 위한 단순한 매장으로 이는 당시 로마의 공동묘지를 사용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공동묘지에 묻히되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매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평신도들의 묘지 사이에 공간을 넓히고 특별한 건축 처리를 가하는 등 중요한 인물의 묘지를 특화 처리했다.

 

성 세바스찬 카타콤 내부 <출처 : FlickreviewR at it.wikipedia>

성 칼리스토 카타콤 내부의 선한 목자 프레스코화 <출처 : wikipedia>

 

 

이 두 시설을 합해서 카타콤이라 부른다. 형성기 때 매장시설은 로마의 공동묘지를 사용했는데, 당시 로마의 공동묘지는 지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마시내에는 묘지를 지을 수 없어서 성 밖에 위치하는데 비아 아르데아티나, 바이 아피아, 비아 라티나 등의 거리에 몰려 있다. 이 거리에는 성 세바스찬의 카타콤, 도미틸라의 카타콤,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 등 대표적인 카타콤이 위치한다. 건축적 구성은 중앙통로와 묘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중앙통로는 주로 일반 신도를 위한 곳으로 양옆의 벽면에 벽감을 파서 석관이나 옹관을 뒀다. 묘실은 쿠비쿨룸이라는 별도의 명칭이나 히포게움이라는 일반적 명칭 등으로 불렸다. 묘실은 재력가, 순교자, 성인 등을 위한 별도의 매장공간이었다. 형태는 사각형을 기본으로 육각형, 팔각형, 비정형형태 등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묘실인 경우 고전주의 파사드로 장식하거나 아치로 벽감을 파는 등 별도의 건축적 처리를 가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기독교 건축의 완성

4세기의 승리기를 이끈 것은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였다. 311년의 기독교 관용령을 시작으로 312년에는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고 313년에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으며 326년에는 동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정치적 야심이 큰 인물이었는데 여기에 기독교 교회의 수장 자리를 자임하면서 황제의 현실 권력에 기독교를 합해 이후 1500년 서양 역사를 이끌어 갈 거대권력을 탄생시켰다. 막센티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기독교도의 참여로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점이 좋은 예이다.

 

  • 1  라테란의 성 요한(St. John in Lateran). 313년경 공사 시작.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도 불리며 바실리카 교회의 시작을 알린 건물이다. 일부 변형이 있긴 했지만 지어지던 당시의 검소한 모습이 남아있다.

     

  • 라테란의 성 요한 교회의 앱스 부분 <출처 : Stefan Bauer at de.wikipedia>

 

 

개인의 종교적 열정에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면서 그는 서양 역사상 가장 많은 교회를 건축한 황제가 되었다. 그가 남긴 기독교 건축의 업적은 단순히 양에만 있지 않았다. 바실리카 교회와 무덤 교회라는 기독교 건축의 두 가지 대표 건물 종류를 최초로 완성시킨 점이 더 중요했다.

 

바실리카는 교회의 집회 기능, 즉 미사를 담당하는 건축양식이다. 원래는 로마 시대 때 시민들의 도시생활을 종합적으로 담당하던 건물 종류였다. 직사각형 공간을 종 방향으로 삼등분해서 중앙 공간과 양옆의 측면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 효율을 높였으며 목조 평천장으로 마감해서 검소함을 대표적 특징으로 가졌다. 시민들 사이의 자발적인 소규모 집회에 맞춰 출입구 반대편 끝에 앱스라는 반원형 천장을 가진 무대를 갖추기도 했다. 크기는 80~90미터 x 50~60미터 정도였으며 수 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바실리카 교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바실리카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회 기능에 맞춰 사용한 교회양식이다. 일단 기능 면에서 큰 변형 없이 미사에 적용될 수 있는 측면이 높았다.

 

구(舊) 성 베드로(Old St. Peter's) - 로마. 319-22년경.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형을 보여준다. 현재의 로마 교황청 전신 건물이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중의 하나인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출처 : wikipdedia>

 

 

중앙 공간은 네이브라는 고참 신도석에, 양 측면공간은 아일이라는 신참 신도석에 각각 맞았다. 직사각형 선형공간은 미사에 요구되는 사제단의 행렬 같은 의식에 적합했다. 앱스 일대는 제단을 놓고 성화를 그리는 장소에 적합했다. 이에 따라 교회 안이 네이브와 아일 쪽의 신도 영역과 앱스 쪽의 성직자 영역으로 구획되었다. 네이브 천장은 2층 높이이고 아일 천장은 1층 높이인데 이는 두 영역의 위계를 드러내는 데 적합 했을 뿐더러 천장 높이 차이를 이용해서 천측창을 내어 실내 채광을 도왔다. 크기도 당시 기독교 교세에 적합해서 주요 교회의 미사에 참석하는 최대 신자 수를 수용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최초의 바실리카 교회는 라테란의 성 요한이었으며 이외에 구 성 베드로, 성 밖의 성 바오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등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교회들이 등장했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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