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9-13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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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교회하면 생각나는 게 뭐가 있나요? 박수치며 찬양하는 것? 목소리가 굵은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 이렇게 물어본다. “믿습니까?” 그냥 맑은 목소리도 아니세요. 아주 굵고 탁한 목소리로 “믿쉽니까?”라고 물어본다. 교회에서 믿느냐 는 이야길 많이 듣는다.
그러면 왜 교회에서는 믿으라고 할까? 무조건 믿어야 할 만큼 증거가 없기 때문일까?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으라는 걸까? 아니다. 그 분명한 증거가 우리에겐 무척 많다. 예수님을 만나고 목격했던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들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행 26:26에『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다.』라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말하고 있다. 그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밝힌다. 예수는 기적을 행했다는 거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셨고 그의 무덤은 비어있다. 는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에 인터넷이 없었다. TV나 라디오, 신문조차 없었다. 그랬다면 순식간에 퍼졌겠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켜보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글을 기록했다.
당시사건들이 만일 거짓이었다면 제자들이 전한 내용이 거짓임을 기록한 문서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 예수 믿는 이들의 반대세력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반대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죠. 사실을 말한 것이었으니 말 못하게 입을 막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은 제자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성경과 고대역사가 동일하게 전하고 있다. 아까 읽었던 본문도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그리고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 준 것 뿐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게 사실이라는 거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왜 자꾸 믿느냐? 고 물어볼까? 왜 자꾸 예수 믿으라고 말할까? 우린 교회에 나가면 다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어떤 분이 택시운전을 하실 때 항상 전도를 하셨다. 하루는 승객분이 이러더라는 거다. “어느 종교든 하나만 믿으면 되지 목적지는 다 같은 거 아닌가? 무슨 종교를 가지던 그건 문제가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말 믿음의 목적지가 같은가?
어느 날 뉴욕근처 모 대학에서 종교지도자 회의가 열렸다. 미국사람들은 모여 서로 존중하며 오랫동안 토론을 했다. 그때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궁금한가? 그 자리에서 무엇이 최고다 이런 결론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때 난 결론은 “서로 다르다”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무엇이든 목적지는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슬람의 말뜻은 “복종”이라고 한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이슬람을 믿는 이들은 신의 노예나 종이라는 거다. 그들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 그것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 신의 법으로 그들을 묶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그 법에 묶이지요. 참 어렵겠다. 불교는 구원이 더 어렵다. 네가 부처가 되라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선 살생을 금하고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며 살다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랑 분명 다르다. 그들은 행위에 대해 말한다. 무언가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을 채워야만 구원받는 거다. 사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살면서 종종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말아야한다.’,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 살아간다. 올해 한해 목표를 세우신 분 손들어볼까? 술 끊자, 담배 끊자, 살 빼자, 돈을 벌자, 결혼하자, 많은 계획이 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작년과 많이 다른가? 매년 비슷할 거다. 나의 삶의 기준을 세우고 지키려하지만 다 지킬 수 없다. 많은 것 중에 몇 개는 이루겠지만 나머지는 항상 짐으로 남는다. 즉 사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기독교의 다른 점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행위가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한다. 오늘 본문은 “영접”하라고 말한다. 영접은 어려운 게 아니다.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동행 하라. 그분과 관계를 맺어 아버지와 자녀의 신분관계가 되라. 이런 말이다. TV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 보면 이경규씨 집에 애견이 많다. 개의 IQ테스트를 하는데 거실 한편에 경규씨는 앉아 개의 이름을 부르며 씩 웃어 보인다. 이에 반응하여 주인에게로 오면 IQ가 높은 거다. 근데 쳐다만 보다가 되레 딸에게로 간다. 한 마리도 오지 않는 거다. 은근히 화가 났다. 영접한다는 것은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주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다. 그분께 철저히 맡기기만 하면 된다.
불교는 깨달으라, 자비를 베풀라, 살생하지 말라고 하죠. 이슬람은 복종하라고 하고요. 하지만 기독교는 관계를 만들라는 거다. 예수님을 영접해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거다. 복종하기 위해서 하루 5번씩 절하며 기도하지 않아도 되요. 그냥 관계를 맺으면 되요. 여기부터 시작이에요. 여러분,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한다. 그런데 그 연애가 어떻게 시작될까?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서로 좋아하는 걸 확인하고 그럼 우리 사귈까? 하고 시작되는 게 연애이고 그 믿음이 이어져서 결혼으로 가게 되지요. 연인이나 부부관계뿐 아니라 모든 사랑의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부모님과 자녀 경우를 보자.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아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아버지라고 할까? 그 사실을 믿으니까.
모든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그 관계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열매가 구원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 그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이 무슨 뜻인가? 구원자이다.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 졌다. 그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해 보려하지만 불가능하다.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고 그 생명으로 우릴 구원하신다.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함께하시고 우리 구원을 완성하셨죠. 그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우릴 얼마나 사랑하는지 죽음으로 직접 보이시고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은 그분을 믿는 일이다. 곧 여러분이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 관계가 시작되는 거다. 그 관계가 시작되면 하나님은 그 구원을 계속 이뤄나가시고 그분의 생명, 능력, 성품이 조금씩 여러분의 것이 되어간다.
무언가를 해서도 아니고 그 사실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자.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니 우리게 요구되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닌 믿는 믿음이다. 믿으시면 아멘하자 !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함은 왜 필요한가? 왜 그럴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런즉 그분의 말씀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원자임을 믿는가?
여러분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기억하는가? 삶이 하나 둘 바뀌지 않는가? 전화비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고 못 먹던 음식도 먹기 시작한다. 연인이 좋아하니까 가기 싫어하던 놀이공원도 일부러 간다.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 보러가고요. 연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성질내기 좋아하던 사람도 그 성질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관계는 그런 거다. 상대를 따라가고 맞춰가는 것이죠. 여자 친구 때문에도 이런 변화가 생기는데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와의 새로운 관계가 생겼다. 예수 믿는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삶이 바뀔까, 안 바뀔까? 아니, 바뀌어야 될까? 안 바뀌어야 될까?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영을 받았다고? 양자이지만 아버지라 부른다. 한국 사람들에게 양자는 조금 이미지가 안 좋다. 그런데 양자는 친 아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권한이 같다. 법적인 아들이다. 이 말씀이 기록된 로마시대에는 양자를 노예시장에서 사왔다. 노예 중에 똑똑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 값을 대신 치러주고 아들삼은 거다. 그 권한은 기존의 아들과 같았다.
한번 생각해보자. 노예시장에서 아이의 값을 대신 다 치루고 양자를 삼았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이 아이가 이전과 같이 살아간다면 어떨까? 양탄자에 무서워 못 올라가고 식탁에서 식사하길 두려워한다면. 양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항상 눈치만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할까? 얘야, 믿어! 너는 이미 나의 아들이 되었으니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어깨를 피고 당당히 살아가라고.
그래서 저도 여러분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속지 말라. 윤리적 기준, 세상의 기준을 만족시킨다고 아들이 되는 것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자녀가 되는 권세를 다 주신다. 육신의 부모는 부득이 자녀를 버리기도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자녀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는다. 확실히 믿으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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