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2:1-11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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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창민형제,윤정자매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분의 하객 예상하는가? 그런데 소문이 나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왔다. 뷔페에 300명분을 주문했는데 500명이 왔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식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분들이 꽤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죄송할까? 하지만 주의 은총 가운데 부족함이 없는 흡족한 결혼식이 되길 바란다.
오늘 본문도 흡사하다. 가나라는 동네에 혼인잔치가 있어 모처럼 예수님과 모친, 제자들도 청함을 받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피로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예수님 당시 혼인잔치는 우리처럼 하루 혹 두세 시간에 끝내는 초고속 피로연이 아니라 대개 일주일 잔치를 했다. 특히 그들 일상적인 음료였던 포도주는 여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슨 이유 에였는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예수 모친께서 아시고 아들에게 조용히 얘길 건네신다. 아마 모친과 가까운 친척의 혼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생을 혼인잔치에 비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신나는 일이 자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즐겁지 못하고 힘든 때가 많다. 잘 나가다가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만나기도 한다. 말 못할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다. 행복하다는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 있다. 문제가 있는데도 그 문제조차도 모르면 해결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 :17)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 기쁨이 없다 흥겹지 않다 그러면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언가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내 삶에 포도주가 말라있다. 기쁨이 떨어졌다 그러면 예수님께 와서 요청해야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시니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4) 대답한다. 좀 이상하다. 어머니께 불손하고 쌀쌀맞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 호칭으로 사용된 “여자”란 당시 격을 갖춘 높임말이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나와 무슨 상관있으며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여러분 생각에 좀 거슬리지요?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냐는 건가? 아니면 적당한 시기가 아니란 말인가? 그래도 어머니가 부탁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대답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을 아시나 예수님은 덥석 아무 문제나 다 해결해 주는 해결사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치는 가나안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마15:26)고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처럼 여긴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인격을 가진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왜 그런 막말을 하셨을까? 이유는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졌는지를 테스트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 앞에서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면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는 믿음이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끝까지 구하며 고난을 인내하는 사람이다. 내 팽개쳐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커다란 그림이 하나 걸려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예술품으로 가치 있는 그림도 아니었다. 단지 바다 썰물이 빠질 때에 함께 밀려나가지 못해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나룻배 한 척과 노가 그려진, 무척 어둡고 처량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 밑에는 “밀물은 반드시 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이 그 그림의 사연을 물었다. 카네기는 대답했다. “나는 젊었을 때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하루는 물건을 팔러 갔다가 어떤 노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그 글귀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 그림과 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노인을 찾아가 정중히 부탁했고 그분은 그 그림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사연을 말한 후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이 그림을 언제나 잘 보이는 곳에다 붙여 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밀려와 내게서 우언가를 휩쓸어갈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밀물은 반드시 온다.’고!”
마치 그림의 썰물처럼 우리에게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삶의 저편으로 쓸려나가 내게서 점점 멀어질 때,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더 이상 내 인생의 나룻배를 움직일 수 없을 때, 마음에 불현듯 밀려오는 좌절감, 두려움, 패배의식이 있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기대할 때이다.
성도여러분, 지금 포기하고 싶은 무엇이 있는가? 답답한 일이 있는가? 아니다. 우리에겐 끝까지 좌절하지 않는 오뚝이와 같은 믿음, 밀물의 때, 회복의 은총을 기다리며 온전히 주님께 간구하며 주님만 절대 신뢰하시기를 축원한다.
둘째로,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긍정적인 믿음을 본다. 만일 어머니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이 “염려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머니의 마음이야 좋았겠지만 그 기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트에 가서 포도주 몇 박스 사러가지 않을 뿐 성경에 굳이 기록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내가 나설 때가 아닙니다.’ 라는 대답을 들은 어머니, 사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한다면 얼마나 섭섭했을까?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에게 재차 요청하지 아니하고 하인들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얼마나 저돌적이며 적극적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바른 믿음이다.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가나안 여인이 더러운 귀신들린 딸아이의 병을 고쳐달라고 왔을 때 주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을 개처럼 여긴 유대인 우월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주님이신가? 아니다. 비록 무시당하고 모멸감 때문에 돌아설 수밖에 없는 믿음이라면 참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한 개 같은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그 개도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마 15:27) 자존심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의 갈망을 표현한 여인에게 주님은 마음껏 축복하시고 칭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런 담대한 믿음이 주님을 움직였다. 예수님은 가까이 돌 항아리 여섯 개를 보셨다. 당시 유대인의 집 출입구에는 손님들의 손과 발을 닦는 물 담은 항아리를 둔다. 혼인잔치에도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있어 더 이상 그다지 쓸모가 없는 항아리를 예수님은 사용하셨다. 군우여러분, 주님 가까이에 있어 주님의 눈에 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혹 주님 보시기에 나는 아무 재능도 없고 더 이상 유용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 가까이에 있으면, 돌 항아리 같은 나를 주님은 여전히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바란다.
주님 말씀하신다.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인들은 물을 아귀까지 가득 채웠다.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하인들은 다시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다. 하인들도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고 다시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해도 “아니 선생님, 손 씻는 물을 연회장에게 왜 갖다 주어야 하나요? 가서 뭐라 할까요?” 감히 묻는 사람도 불편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순종하였다. 그릇에 담아 갖다 주는 동안 물은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 연회장은 하인들이 가져온 것을 보니 정말 최상품의 포도주였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칭찬한다. “여보게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소.” 그날 혼인잔치는 더욱 풍성하여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사용되는 항아리를 선택하셨는가? ‘왜 포도주 항아리가 아니라 유대인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항아리를 사용하셨는가?’에 의문을 갖는다. 이것은 율법에서 복음으로 변화를 가져옴을 상징한다. 돌 항아리의 물은 율법을 의미하며,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의 더 풍성한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됨은 단순한 기적만 아니라 기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돌 항아리의 물은 손발을 씻지만 포도주는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사용하셨던 것처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은 바로 “피 흘리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주님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이다. 우리 삶에도 주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 원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기 바란다. 주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뭐라 하셨는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 담대한 믿음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거나 불순종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인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시작한다. 반대로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도 묵묵히 순종한 아브라함도 있다. 용맹 있는 여호수아도 순간 사람의 소리 듣고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기도 했다. 요나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사울왕도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히 제사를 드리는(삼상13:12) 실수를 했다.
나의 경험과 판단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내가 풀 수 없으며 주께 기도하며 주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행한 일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울부짖으시면 서도 십자가 위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던 주님이셨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을 온전히 맡기는 여러분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기적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하는가? 우리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됨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언제나 주님께 맡기기 바란다.
항상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만 신뢰하며 주의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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