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신명기20:1-9 개역개정
-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5.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9.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가지게 되는 불안한 감정을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그 사례도 매우 다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며 매우 좋아합니다. 중동 어느 지역에서는 식용으로 사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물세 살이나 된 제 딸아이는 지금도 비둘기가 있으면 두려워서 길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 공원에서 비둘기에 놀란 트라우마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매우 개인적이며, 주관적이고, 그 형태도 매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단 하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 두려움을 싫어한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에게는 인터넷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두려움에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이 기본 요소나 그것들이 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1.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전에 63빌딩 옥상에 올라갈 기회가 있어서 밑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습니다. 떨어져 죽을까봐 무서울 틈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오금이 저리도록 두려웠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2. 절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 그대로 신체의 부분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인체의 기관이나 부분, 자연적 기능을 다른 존재에 의해 잃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3. 자유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리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마비되거나, 제한되거나, 갇히거나, 덫에 빠지거나, 묻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사회적으로는 어떤 환경에 의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시 MRI를 촬영해 보셨나요? 아직 안 찍어 보신 분 평생 찍으실 일이 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꼼짝 달살 못하게 고정시킵니다. 이럴 때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여러 명이 함께 모여 있는 때, 투명인간이 된 듯한 두려움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때 느끼는 두려움도 여기 포함됩니다. (예화; 가족들과 있을 때 아버지들이 느끼는 외로움)
4. 분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버려지고, 거부되고, 관계를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또 다른 이에게 갈망의 대상으로, 존중의 대상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벌써 30년 가까이를 날마다 24시간을 마진영 사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출장을 가도 같이 갑니다. 마진영 사관과 떨어져 있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불쾌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분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5. 자아의 죽음(Ego-death)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아가 파괴됨으로써 더 이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사거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대한 두려움입니다.
간혹 바바리코트를 입고 여학교에 나타나는 분들이 계신데 어찌보면 이분들은 이 두려움을 극복해보려는 잘못된 시도를 하는 분들입니다. 이렇게라도 관심을 끌어보려는 일탈된 행동을 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간단한 계층구조를 가집니다. 가장 아래에는 소멸의 두려움이 있고 가장 위에는 자아의 죽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결국, 가장 기본적으로 이러한 두려움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말을 조금 비틀면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생존하지 못할까봐, 더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눈을 성경 본문 속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신명기서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탈출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정리해서 전해주는 강의(설교)입니다.
그중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전쟁에 관한 규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임하는 국민군 이스라엘의 자세와 징집에서 면제받는 자의 사람들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에 반복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절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지성경은 조금 더 자세히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3절에는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 “전의가 꺽이지 않게 하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침착하십시오.”라고 4차례나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40여년의 광야에서 실전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이라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국민군이라는 한계를 가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향토예비군이나 민방위와 같은 군대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습관을 벗지 못하여 40년간이나 광야에서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 후에 고작 소나 양을 치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해 전쟁터에서 만날 상대는 “말과 병거와 백성” 즉 “기병부대와 전차부대와 보병부대”로 구성된 직업 군인들입니다. 얼마 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역사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10가지 무기 가운데 이집트에서 개발한 “전차(병거)”라 포함되었던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그 전차의 위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전차(병거)라는 것은 그만큼 공포의 첨단무기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들의 많은 기병과 전차를 보고 두려하고 움츠러들었겠습니까? 왜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을 포기하려고 했겠습니까? 생존하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상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대신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앞세워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①마음에 겁내지 말며 ②두려워하지 말며 ③떨지 말며 ④놀라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을 네 번이나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붙잡혀 굴복하지 말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 사람의 병력이 아쉬운 이 때, 오히려 1) 새 집을 짓고 살아보지 못한 사람, 2) 포도농사를 지어 놓고 수확을 앞둔 사람, 3) 약혼자를 아내를 맞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돌아가라고 명합니다. 심지어 4) 무서워서 싸우기 싫은 사람들마저도 돌아가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이 전쟁이 세속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소멸, 분리, 절단, 상실 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전쟁은 늘 승리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실제로 소멸이나 분리, 절단, 상실, 죽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언제부터 우리네 인생에게 소멸, 분리, 절단, 상실, 죽음이 찾아왔나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 우리네 인생이 죽을까봐 노심초사하고, 분리와 절단을 근심하고, 상실을 두려워하고, 자아 상실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부터 현대의 철학자들까지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하지만 아직 그 어느 누구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의학,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유전자복제와 3D프린터를 이용하여 인간 신체의 일부를 복제해서 자동차 부속품 갈아 끼우듯이 아픈 부분을 이식하여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열 발을 양보해서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움까지는 치유하지 못합니다.
많은 종교의 이름을 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제외한 어떤 종교도 고통과 죽음의 문제 말하고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지난 주 부활주일을 지켰습니다만 빈 무덤을 말하는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다른 종교는 그저 종교의 이름을 가진 시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떠난 인생에게 찾아 온 것이 소멸과 분리와 절단과 상실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생은 그것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라보고도 놀라고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문제라면 원칙적으로 그 문제가 된 상황을 원점으로 돌려놓아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소멸, 분리, 절단, 상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에게는 더 이상 소멸과 분리와 절단과 상실 그리고 죽음의 문제가 없고, 그것이 더 이상 두려움이 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너희는 피곤하고 지쳤느냐? 종교생활에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너라.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의 삶이 회복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제대로 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아라. 자연스러운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나는 너희에게 무겁고 맞지 않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나와 함께 있으면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가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길을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치고 탈진을 반복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길, 그리고 믿는 자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배워 쉽고,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규원(중1),태희(초4), 도경, 하경에게 무엇을 주어야 가장 귀중한 것을 유산으로 주는 것이겠습니까?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번 주부터 여러분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유롭고, 가볍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이름대로 늘 푸른초장에 머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