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창세기1:26-2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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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9.11.10. [주일성결회 ; 푸른초장영문]
매무새를 따라서 생김새대로
창세기 1:26-27
김창옥이라는 스타강사가 있습니다. 어느 강연에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어릴 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인간”인 줄 알았답니다. 항상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를 가리켜 “짐승만도 못한 인간”, “귀신은 뭐하나 몰라 저 인간 안 잡아가고.”, “내가 저 인간 만나서 지지리 고생이다.” 매번 “저 인간, 저 인간”하셔서 자기 아버지 이름이 “인간”인줄 알았다는 농담을 합니다. 우리 어머님들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지 않으신가요? 저도 저희는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그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 말고 “사람”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간(人間)”은 한자말입니다. 그에 비해 “사람”이라는 말은 순우리말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우리말인 “사람”은 “살+ᄋᆞᆷ”에서 왔습니다. “살다”라는 말의 어간인 “살”에 접미사인 “ᄋᆞᆷ”을 붙여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말에는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살다”, “살아있다”라는 말에서는 “사람” 말고도 “삶, 숨, 사랑”이 파생되었습니다. “사람”, “삶”, “숨”, “사랑”이 같은 뿌리를 갖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며 살 때 진정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됩니다.
항상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그 사랑을 표현하며 살아가시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현하지 못하고 살다가 상대가 내 곁을 떠나가면 그 때서 후회합니다. 내 곁에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할 걸, 돈드는 일도 아닌데 왜 그걸 못했나 하는 회한이 밀려옵니다. 표현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며칠 전에는 제 아들 성국이가 할머니들과 통화를 마치고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옵니다. “드디어 외할머니께서 사랑한다고 먼저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7년을 넘게 외할머니를 향해서 먼저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장모님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아니고 외강내강(外剛內剛)이십니다. 절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한다고 문을 두드리니 이제는 문이 열렸습니다.
지금해보겠습니다. 지금 옆에 계신 분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시면서 허그해 주시면 더 좋구요. “사랑합니다. 푸른초장에서 한 가족이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께도 고백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성령님 내안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항상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사랑꾼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사람”이 “사람”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사람이 만들어진 목적을 살펴봄으로 어떻게 살아야 지어진 목적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하나님의 성품(형상)과 생김새(모양)을 닮은 “사람”으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뜻을 생각해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성품과 생김새를 따라 지어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닮은꼴로 지어졌습니다. 숨을 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은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상)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이 무엇인지를 새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입니다. 형상(刑象)은 이미지(image)로 모양(模樣)은 생김새(likeness)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는 성품(性品)과 관련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생김새와 관련됩니다. 사람의 성품, 매무새가, 사람의 모양, 생김새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사람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형상에는 “따라서”가 모양에는 “대로”가 붙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매무새는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김새는 본뜬 듯이 같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닮은꼴로 창조되었기에 그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창세기 1:26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람살이의 됨됨이를 “하나님 닮기(Imitatio Dei)”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너희는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라는 율법의 말씀이나, 신약시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하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람살이의 길을 “하나님 닮기”로 정해줍니다. 성결의 교사 사무엘 로간 브랭글은 “성결(聖潔)은 죄 많은 성질을 없이 하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것 바로 그것이 성화요, 성결이다. 즉 성결이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담는 것”이 성결(聖潔)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 개인적 삶에서의 성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을 닮는 것이 거룩이고, 성별이고, 성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순종과 죄의 결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안 닮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닮기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창조의 원형(原形)을 상실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죄와 죽음에 메여 죽어가는 존재, 하루를 살면 그 하루만큼 죽음으로 가까지 가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얽혀있는 실마리를 풀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사람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곁으로 가야 해결 할 수 있는데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로는 도대체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뭐가 이쁘다고 사람을 살리시려고 당신이 사람 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回復)하게 해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푸른초장 군우 여러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 숨이 없는 존재를 버리고 살아있고 숨을 쉬는 사람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셔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셔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 닮으셔야 합니다. 아들과 딸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나가면 닮았다고 누가보아도 황사관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과 닮았다.” “분명히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아들이고 딸이다.”라는 말을 듣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셨을까요? 다른 동물같이 말씀으로만 “……있어라.”, “……하여라.”라고 명령하여 지으시지 않으시고, 손수 당신의 모양대로 진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짓기 위해 숨결(생기)을 불어 넣으시는 수고를 하셨을까요?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모양대로 지으신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까닭은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짐승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창조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셔서 그 빛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委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보다 앞서 지어진 창조세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자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임하시는 노동은 강제 부역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다스리는(dominium tarrae) 사명을 맡기고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문제는 “다스리다.”는 말의 어감(語感)입니다.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은 단순히 “군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 다스리는 주인공은 왕(王)이었습니다. 창세기 1:26-27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다스림의 사명은 왕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뒤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땅을 “다스리는” 책임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폭력으로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목자처럼 사려깊게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6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본질(本質)만이 아니라 사람의 역할(役割)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지으신 사람에게 일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역할(役割)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 일거리를 맡은 사람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런 일거리를 맡기신 것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됩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창 2:15)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사람은 결코 관객이나 들러리가 아닙니다. 그저 의미없이 왔다가 그저 의미없이 가야하는 허무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에덴을, 창조세계를 돌보는 목자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땅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과 인내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샬롬과 평화의 무대로 다스리셨습니다.
사람은 바로 이런 다스림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 땅위에 이루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경영학이나 행정학에서는 위임(委任)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존재입니다. 위임을 받은 자는 위임한 사람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거룩하게 다스렸으니 너도 날 대신하여 거룩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확장할 수도 있고, ‘내가 거룩한 세상으로 만들었으니 너도 거룩한 세상이 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거룩, 성결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위임을 받는 사람의 거룩함, 성결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위임받은 자, 청지기의 성결을 넘어서 세상의 거룩함, 성결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을 넘어서 하나님이 만들고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땅을, 에덴을, 피조세계의 거룩함, 성결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회의 성결, 사회의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11:6-9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함을 상실한 시대를 향해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다스릴 세상을 선포합니다. 왕들은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사회의 건설에 실패하고, 백성들은 권력자들 밑에서 신음하고 있고,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분쟁하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거룩함이라고는 땅바닥에 팽개쳐져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볼 수 없는 사회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 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 그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곁에서 놀며 어린 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는 해로운 것이나 악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세상은 메시야를 통해 회복될 세상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형의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위임하신 세상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한 세상, 거룩한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당신 닮은 사람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매무새를 따라 하나님의 생김새대로 지음 받으신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개인의 성결, 개인의 구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개인 안의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매무새, 하나님의 모양/생김새를 회복시키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 닮은 존재, 성결한 존재로 거듭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아가 나를 통하여 내 가정이, 내 교회가, 내가 몸담는 직장이, 내가 소속된 이 사회가 성결해지는 역사가 시작되기를 축원합니다. 나 자신을 작게 보지 마십시오.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내 안에 역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의 엄청난 역사가 1903년 8월 24일부터 시작된 사경회에서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선교사의 한 사람의 회개에서 촉발되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1890년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했던 남감리교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lexa Hardie, 河鯉泳)는 부산과 원산 등에서 사역하였으나 선교의 열매가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원인을 민족적 우월감, 자만심에 빠져 무식하고 미개한 조선인에게 돌리던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디가 처음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 때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한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만, 심령의 강퍅함, 그리고 믿음의 부족”등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거룩함, 성결로 돌아선 한 사람의 회개가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100만인구령운동으로 번져나간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자녀와 가정과 이 교회와 직장과 나아가 사회를 변화 시키는 하나님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세군선교선언문(Mission Statement)에 보면 구세군의 사역의 목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세군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차별없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있다.”구세군은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2)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없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는 복음주의 교단의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성경이고,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구세군은 “성결(聖潔)”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에서는 영문사역을 통한 개인의 성결과 사회사역을 통한 사회의 성결을 사역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매무새를 따라 모양새대로 지으신 목적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성취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많은 개신교회 중에서 구세군으로 부르시고, 이곳 푸른초장 영문으로 불러주신 목적을 이루시는 신앙인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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