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창세기2: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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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전에는 거의 모든 분이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셨습니다. 저도 중학교 입학선물로 선친(先親)에게서 받는 것이 손목시계였습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시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채워주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손목시계가 필요없는 시대가 되었죠? 어디를 보아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핸드폰이 시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이제 손목시계는 악세서리와 같은 역할을 주로 하거나 스마트워치로 진화하여 시간 보다는 디지털 기능이나 건강 기능으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계 보다는 혈압관리 목적으로 스마트워치를 사용합니다. 한 시간 단위로 혈압을 측정하여 스마트폰으로 전송하여 기록을 남겨둡니다.
시계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시간(時間)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주 쓰는 말이긴 한데 딱 꼬집에 무어라고 말하지 쉽지 않습니다. Google에게 물어 봤더니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더 어렵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하잖아요? 그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든 기준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복잡해질수록 변화를 측정하는 어떤 기준을 만들어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잠자던 시대에서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등을 만들어 나름 변화를 측정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지나 세계가 점점 가까워지며 통일된 기준을 필요로 하죠. 그래서 지금 사용하는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공전(公轉)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1년(年)이라는 기준을 정했습니다. 지구가 스스로 도는 것을 자전(自轉)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1일(日)로 기준삼기로 했습니다. 다시 1일(日)을 24등분해서 1시(時)로 정하고, 1시(時)를 60등분해서 1분(分)으로, 1분을 60등분해서 1초(秒)라 기준을 정하여 사용하게 된 겁니다. 그 후 1초의 정의는 1967년 제13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태양시(solar time)기준에서 원자시(atomic time)기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초는 세슘133(133Cs)의 원자가 9,192,631,770 (91억9천2백6심3만1천770)번 진동하는 주기를 1초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은 변화를 전제하고 이것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변화가 없다면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변화가 없다면 그 변화를 측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시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태초에 In the beginning”입니다. 이 단어를 설명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시간상으로 맨 처음에”라는 뜻 맞습니까? ((응답)) 방금 전까지 시간이라는 것은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변화가 먼저 생기고 나서 그것을 측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은 것이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변화가 없었고, 변화가 없으니 그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시간의 개념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태초”는 시간이 생기기도 이전의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변화가 시작되었고, 그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시간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시간 위에 계신분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지음을 받고, 그래서 유한하고 변화를 겪어야 하는 인간의 기준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갇히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이 신실하십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기준인 시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꿰어 맞추려고 합니다. 언제까지라고 내가 세운 내 기준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하나님께서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말이 조금 이상합니다만,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계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자리로, 나의 기준으로 이해하려는 불행한 시도를 포기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해석하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메시지 성경은 “만물이 시작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고백(告白)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宣布)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화론(進化論)’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창조론(創造論)’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왜 ‘창조법칙’이나 ‘진화법칙’이라고 말하지 않는가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과학적으로 10번이고 100이고 실험해서 같은 결과가 나올 때 ‘법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나 창조는 모두 실험을 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증명된 법칙(法則)이 아니고 가설(假設)로서 ‘론(論)’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말이 잠시 곁길로 샛습니다. 성경은 ‘진화론(進化論)’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창조론(創造論)’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창조과학을 지지하고 계신 많은 크리스천이 들으면 섭섭하시겠지만 성경은 창조론도 진화론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창조론(創造論)’이 성경적 기반에 서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이 창조론(創造論)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창세기 1:1-2:3은 지음받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때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記寫)는 설명(說明)이 아니라 선포(宣布)이고 고백(告白)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기사(記寫)는 과학적 증명이나 철학적인 논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 특별히 창세기 1:1-2:3의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선포, 믿음의 고백이지 우리의 이해나 동의를 요청하고 있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이제 본문에 선포되고 고백된 창조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 빛을 낮, 빛이 없는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 지났습니다. 둘째 날은 물 한가운데로 창공(궁창)이 만드셔서 창공 아래 물과 창공 위의 물로 갈라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창공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 지났습니다. 셋째 날은 창공 아래 있는 물을 모으셔서 물들이 있는 부분과 물들이 없는 부분으로 구분하시고 물이 있는 부분을 바다(海)라고 부르시고, 물들이 없는 부분을 땅(地)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식물들을 자라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 지났습니다.
넷째 날은 해(日)와 달(月)을 만드셔서 해(日)로는 낮(晝)은 주관하게 하셔서 계절과 일자와 년도가 생겼습니다. 달(月)로는 밤(夜)을 주관하게 하시고 창공에 별(星)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 지났습니다.다섯째 날에는, 하늘에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잘 자라서, 번성해 지고, 땅과 바다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 지났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에 생물을 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 지났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혼돈(混沌), 공허(空虛), 무(無)에 하나님 말씀하셔서 세상을 만드셨는데 1-3일에는 창조 공간의 골격, 무대를 만드신 다음 4-6일에는 창조 공간의 골격, 무대를 채울 생명체를 만드시는 나눔, 채움, 유(有)를 만드셨습니다. 1일에 만드신 빛과 어두움의 공간에 4일에 해와 달과 별을 채우셨고, 2일에 만드신 창공과 창공 위/아래 물에 5일에는 물고기와 새들을 채우셨습니다. 3일에 만든 육지와 그 육지에 심긴 식물 가운데 6일에는 동물을 채우시고, 끝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 만드셨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창조가 이렇게 다 끝이 났나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다 마치셨습니까? ((응답)) 2장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이어서 일곱째 날(7일)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응답))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게 복을 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일을 마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창조의 목적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계 4:11에서는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골 1:16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를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셨겠습니까? 이사야 43:7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고전 10:3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만물을 지으셨다고 창조의 목적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셨다고 어려우셔서 쉬어야 하는 분입니까? 그것도 말씀으로만 다하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만 진흙으로 지으셔서 숨을 불어 넣는 정도의 어렵지 일을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고, 그렇다고 정신노동이나 감정노동이 심한 일을 하신 것 같지도 않은데 7일째 되는 날은 쉬셨답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엄살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일곱째 날은 창조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당신이 지으신 만물과 그것을 누리도록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과 함께 쉬시려고 그 날을 축복하고, 거룩한 날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굳지 “일곱째 날”이라고 세 번씩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니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성경책의 첫머리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닮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저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불순종, 죄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 이 핸드폰이 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적을 상실한 겁니다. 괜히 월 통화료 낼 것 없이 당장 내다 버려야 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목적을 상실한 인간도 하나님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버림을 받는 것이 가혹하거나 야속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거기가 지옥(地獄)입니다. 다시는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없는 곳, 거기가 지옥(地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적을 상실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고쳐서 다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고침을 받으면 창조의 목적을 회복시키셔서 다시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경이 그렇게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은 이전의 여섯 날과는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일곱째 날은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도 이전의 날과는 구분이 됩니다. 지금까지 창조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하루가 지났다.”라는 추임새와 함께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추임새가 일곱째 날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날짜의 계산은 창조의 과정을 담은 계산 방식입니다.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진행되었습니다. 혼돈에서 정돈으로 가는 방식입니다. 어두움이 빛으로 밝아지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의 혼돈, 카오스를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이런 방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창조의 일곱 째 날에는 저녁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 날에도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창조의 질서는 어김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반복하지 않은 것은 저녁으로 상징되는 어두움이 거룩함을 침범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를 가르치려고 창조의 일곱째 날을 소개하는 기사는 의도적으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를 넣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일곱째 날의 은총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체험하였습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패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새벽에 절정에 달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어두움의 권세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긴 홀로코스트, 나찌의 만행 가운데 살면서도 안식일을 꿋꿋이 지켰습니다. 안식하는 날은 유대인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는 울타리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그 시절을 극적으로 살아내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주었다!”고 말입니다. 동일한 고백을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킵니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크리스천의 삶속에서 재현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서야 합니다.
더 이상 어두움의 권세, 좌와 사망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목적이 달성되는 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일을 지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이 저와 여러분을 지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함이 저와 여러분을 어두움의 권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오늘 주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역사하시길 축원합니다.
푸른초장 군우 여러분, 오늘은 창세기 처음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불행한 시도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심으로 거듭남을 통해 창조의 영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닮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니시는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돌이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저와 여러분을 지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누리심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늘 빛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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