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홍사관 설교

  • 생명의 말씀 >
  • 황규홍사관 설교
그들은 왜 당황했을까요?
황규홍 2019-10-17 추천 0 댓글 0 조회 399
[성경본문] 마가복음5:21-41 개역개정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오래된 아재 개그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응답)) 구글에게 물어보니 열역학, 물리학, 양자역학, 위상수학 등 분야별로 18가지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제목도 이해가 안가고 제가 이해했던 몇 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유전공학자들은 유전공학을 통해 냉장고보다 작은 코끼리를 만들면 된다고 한답니다. 그럼 기계공학자들의 해법은요? 맞습니다. 코끼리보다 큰 냉장고를 만들면 되겠지요. 축산업자들은 코끼리를 도살해서 부위별로 구분해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고 대답한답니다그러면 대한민국 경찰은요? 패러디, 풍자인데요 토끼를 잡아 코끼리라고 자백하게 한 후 냉장고에 넣는면 된답니다. 마케팅학자들은 동물원의 이름을 냉장고로 바꾸고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갔다고 홍보하면 된다고 하네요. 작명철학자들은 이미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것의 이름을 코끼리라고 바꾸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실없는 우수개 소리입니다만, 우리네 인생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모든 것을 가지가 가진 프레임, 틀 속에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대체가 그 프레임으로는 도대체 해석할 수 없는 것도 그 속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 안에 넣으려는 것처럼 말입니다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오류를 범합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오류의 수정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가에 살고 있던 미친 사람의 정신을 온전하게 해 주셨습니다(5:1-20). 그렇게 병 잘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니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5:21).

 

거기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야이로와 만나셨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는데, 유대교의 회당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더 이상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성전을 대신해 모여서 율법과 시가서를 낭송하면서 시작된 유대교회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회당장은 목사 정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그 야이로가 무리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 딸을 고쳐 달라고 엎드려 부탁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를 보고는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애원했다. “제 사랑하는 딸이 죽음의 문턱에 있습니다. 병이 나아서 살 수 있도록 오셔서 손을 얹어 주십시오. (5:22-23 메시지성경)


예수님은 회당장 이야로의 간청을 수락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볼 생각에 예수님을 에워싸 밀면서 쫓아갔습니다(5:24). 문제는 그 다음 장면에서 생깁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십 이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여자는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형편 없는 치료로 돈만 날리고 상태가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 (5:25-27)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에 12년 동안 피흘리는 병을 앓아 온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익히 소문을 들어 온 여인은 자신의 병도 치료받고자 무리에 낀 것입니다. 그녀는 인파 속에 있다가 슬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흐르던 피가 멈추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직감했습니다(5:29). 병고침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그냥 가게 두지 않으십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기운이 나간 것을 아시고, 무리에게 돌아서서 물으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530) 치료의 기운이 빠져나갔음을 느낀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셨습니다상황을 모르는 제자들은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한 일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싼 채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인데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시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마치 만원 지하철에서 누가 밀어?”라고 묻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해 봅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무리가 이렇게 밀고 당기는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다니요. 손을 댄 사람이 수십 명은 될 것입니다."(5:31)  제자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성경 말씀 그대로 이 인파 가운데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이 많을 텐데, 어떻게 찾을 수 있냐는 겁니다. 못 찾는다고 드린 말씀입니다. 그 내면에는 어차피 못 찾을 사람 찾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이야로의 집으로 가서 죽어가는 딸을 살려주자는 말입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될 급한 상황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여인의 병이 나았으니 굳이 멈춰서서 그 여인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병이 나은 여인과 대화하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 시간을 버리고 있으니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주변의 여러 사람이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또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많이 당황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다가 고침받은 여인회당장 이야로입니다.

 

먼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다가 고침받은 여인은 왜 당황했을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여인은 질병으로 무려 12년간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겪어 온 더 큰 고통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 사회에서 혈루병은 죄였다는 점입니다레위기와 민수기는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 유출병이나 나병을 앓는 이는 부정하고 그들과 접촉하는 이들도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3-15, 19). 열두 해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한 이 여인을 동네 사람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따라 격리되어 살았을 겁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의사를 찾아다녔을 겁니다. 가진 재산을 다 사용하기까지 노력했지만 병이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었습니다. 병 자체로도 고통스러운데 이제 영원히 부정한 사람의 굴레를 벗을 길이 없어지게 생긴 겁니다. 더 이상 사랑하는 부모형제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가 없어지게 생긴 겁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그런 고민을 하게 될 겁니다. 구차한 목숨을 살겠다고 바둥바둥거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고민을 할 겁니다. 우리네 인생에게 살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절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이 죽음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마음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 곧 그분이 특별한 분이고 그를 만난 병자들이 모두 나았고 여느 의사들과 달리 돈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는지 소문만 들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분의 옷자락에 손가락만 대어도 내가 낫겠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28).

 

그 믿음대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치료받았습니다. 나을 것이라고 믿기는 했지만 실제로 몸에서 피가 그치고 기력이 회복되었음을 느낀 순간, 그녀는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었으니 조용히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기뻐하고 감사해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사실대로 말하였다.”고 전합니다(5:33). 그녀는 혈루병에 걸린 부정한 죄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들도 부정해지기 때문에 그런 죄인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예수님만 조용히 계셨다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거기에 모인 유대인들로부터 정죄를 받아야 할 처지에 처한 겁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회당장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 이야로가 부정해지면 회당에서 모임을 주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 여인과 접촉했다는 것이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야이로처럼 당당하게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이 자신을 찾으시니 모든 것이 폭로될 테고 여인은 살기 위해 나왔다가 죽게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여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상을 엎고 여인이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딸아, 너는 믿음으로 모험을 했고 이제 온전해 졌다. 잘 살아라. 병이 나았으니 복되게 살아라.”(5:34) 딸아!” 이 한마디에 여인의 마음은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받으며 격리되어 지냈고, 사람들은 그녀를 벌레 보듯 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숱하게 의사들을 만났으나 실패했고 재산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가 누구에게 마음을 내보일 수 있었을까요? 빗장을 단단히 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1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듣지 못했던 따뜻한 음성으로 딸아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몸의 회복보다 더 큰 마음의 회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주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면 기뻐합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기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주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만큼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오늘은 남자들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남자들도 외로울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고, 지치고 탈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외로워집니다하지만 저를 포함한 한국 남자들은 참 애처롭습니다. 아무리 외롭고 슬퍼도 그걸 내색하면 안된다고 학습되고 강요된 삶을 삽니다. 어린 남자아이가 울면 뭐라고 달래십니까? “울지마라. 사내아이가 그만 일로 울면 ○○떨어진다.” 어릴 때부터 강한 척하는 존재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 남자들입니다. 가장으로서, 상사로서, 리더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울어야 할 때도 정해져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 세 번 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울 기회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 운 거야 내 의지도 아니지만 이미 지난일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못 울고, 나라는 망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그래 기껏 찾는 방법이 술기운을 빌려 꺼이꺼이 울거나, 멀쩡히 서있는 전봇대에 시비를 걸거나, 노래방에서 휴지를 머리에 두르고 소화기를 들고 소리를 치며 슬픔과 외로움을 달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다음날 만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어제 저녁 회식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 그렇게 안타깝게 살아갑니다.

 

우린 그렇게도 못하니 하나님께 나갈 수밖에요. 그 때 하나님께서 백허그를 하시면서 아들아 내가 네 마음을 안다. 아들아 내가 네 마음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몸 앞쪽으로는 그동안 억누르며 지내왔던 설움도 복받쳐 오릅니다. 그리도 뒤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 어려움을, 내 걱정을, 내 슬픔을 아신다는 위로와 평안이 등즐기를 타고 온몸에 퍼지면서 참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것도 기뻤겠으나, 주님이 친히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고 영적 힘을 북돋아 주시니 참으로 든든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주님이 급하게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여인을 부르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꼭꼭 감춰두고 혼자서 아파했던 상처들, 혼자서 고민하며 잠 못들어 했던 걱정들, 부모님이, 배우자가, 자녀가 알면 걱정할까봐 말못하고 심중에 담고 있던 고민들 예수님은 아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푸른초장 군우 여러분, 스스로의 틀(와꾸, 프렘임)에 예수님을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틀에 갇히시거나 그 틀로 해석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틀 밖으로 손을 내밀어 이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틀 밖으로 손을 내밀어 예수님께 도우심을 청하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의심없이 믿고 그 발 앞에 엎드리시기를 권면드립니다.

 

딸아, 아들아, 너는 믿음으로 이제 온전해 졌다. 잘 살아라. 복되게 살아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만져주심으로 참 평강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봄비와 같이 촉촉이 내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 많이 당황했던 또 한 사람 이야로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유대교 회당장입니다. 교권(敎勸)의 중심에 서서 예수님을 경계하던 부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에는 능했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 죽어갑니다. 갑작스런 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결단을 통해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가롭게 자기 옷을 만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만약 내 자녀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차를 멈추고 누군가와 끝 모를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는 그를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이로는 예수님을 혼낼 처지가 아니니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걱정하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아직 말씀하시는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해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5:35)

 

예수님이 여인과 계속 대화를 하던 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535).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조금만 빨랐어도, 이 여인과 조금만 빨리 대화를 끝냈어도 아이가 죽기 전에 집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야이로는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간발의 차이로 어긋난 운명을 생각하며 괴로워할 때가 우리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미 상황은 벌어졌습니다. 소식을 알리러 온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따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을 더 괴롭히시려 합니까?”(5:35). 이 말은 예의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예의를 가장한 불신앙의 표현이자, 겸손을 가장한 냉소의 표현입니다. “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필요없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5:36) 메시지 성경은 이 말씀을 그 말을 듣지 말고 나만 신뢰하여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세상의 많은 소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주로 대중매체를 통해, 어떤 때는 주변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 우리의 마음을 훔쳐갑니다하지만 그 말들이 나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바로 그때가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그 말을 듣지 말고 나만 신뢰하여라.”

 

이윽고 야이로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열두 살 꽃다운 아이가 방금 목숨을 잃은지라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이렇게 너도나도 울고불고 말이 많으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5:39)  이 말에 사람들이 저가 알지도 못하면서 저러고 있다고 비웃었습니다. 회당장 이야로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고 부모와 세 제자를 데리고 시신을 누인 방에 들어가셨습니다.(5:40)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는 완전히 죽어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주님은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5:41)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에 정말 소녀는 벌떡 일어나 걷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도 고치시고 아이도 살려 내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가버나 에 오신 예수님께 할 일이 생겼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이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아마 이런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빨리 가서 야이로의 딸을 구할까?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여인의 문제를 해결할까?”저는 목표중심적인 사람이라 일단 급하니까 가던 길을 가자고 결론 내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단 죽기 전에 먼저 살려야 하니 이야로의 딸을 살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을 겁니다.

 

12년을 앓아왔는데 하루 더 추가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여인의 육신의 질병은 이미 고침을 받았으니 먼저 이야로의 딸을 살려 놓고 돌아와서 이 여인과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그랬던 것 같고, 이야로의 생각이나 이야로 집에 모인 사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들 생각대로 행하지 않으신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 서운함, 불신감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멈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늦더라도 아이를 살려 낼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인간을 가두고 있는 이 제한 속에서 이해할 수 있거나 정의할 수 있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한된 틀 속에 예수님의 가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틀로 이해할 수 없거나, 그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예수님의 배척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을 고집하려고 합니다.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예수님만이 12년 만성 혈루병의 여인도 이야로의 딸도 살리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나 이야로나 사람들의 제한된 틀(프레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제한된 틀 속에 갇혀있는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인간의 예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제한된 틀의 속박을 벗기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를 예수님이 행하시도록 믿고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주일(主日)이 우리를 지킵니다 황규홍 2019.11.08 0 354
다음글 왜 몰랐을까요? 황규홍 2019.10.09 0 463

03737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476 구세군빌딩 12층 TEL : 02-831-0201 지도보기

Copyright © 구세군푸른초장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6
  • Total100,082
  • rss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