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도행전4:12 개역개정
-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The mercy seat in the salvation army prehistory.
구세군 이전의 자비석
자렛트 칼은 “기독교 역사상 공개적 고백의 행위가 일시적이나마 없어졌다가 다시 여러 가지 형태로 회복되어 온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18세기 영국교회에서는 용서의 체험이 왕성했었으나 이제는 거의 다 잃었고 그 대신 메도디스트 교파에서 공개적 고백이 성행되다가 이제 다시 구세군이 회개석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공석에서의 가치 있는 회개의 상당한 부분을 재발견한 것이 보인다.”고 했다.
Nazianzus의 Gregory(330-389)는 4세기까지 비잔틴 신학자로서 능력 있는 복음전파자로서 당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 요한과 함께 1월 15일과 1월 3일에 두 번의 축제일로 보낼 정도였다. 그는 항상 죄의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했다. 그가 메시지를 선포할 때마다 목소리가 시원했고, 강열했기 때문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예수 앞으로 돌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강단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Antioch에 John Chrysostom(347-407)은 황금 목소리로 구약과 히브리서를 제외하고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내용을 선포했다. 그가 회중이 심령으로 말씀에 응답할 수 있도록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 있다는 복음을 선포하자 회중들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다.
Patrick(390-461)은 신부 집안의 아들이자 신부의 손자로 영국 서남부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아일랜드의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일랜드의 노예로 팔렸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문제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다가 6년 후에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고 200 마일 떨어진 항구로 도방쳐 나왔다. 그는 선원들을 설득하여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는 많은 변화를 거친 후 가족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을 감사하며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에게 가족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반대했으나 가정을 떠나왔다. 그는 불신자들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불타는 열정으로 성실함과 친절함 그리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니고 복음 선포하여 12만 명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Boniface(680-754)은 너슬링에 있는 수도원에서 훈련을 받았다. 후에 영국의 대 수도원장직을 거절하고 프리지아로 가서 영국의 선교사인 윌리브로르드 밑에서 일하면서 747년 경 공의회를 통하여 대주교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프리지아로 돌아가서 엘리야처럼 사신 우상과 싸우면 20년간 복음 선포하면서 10만명의 회개인를 얻었고 그 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활동했었으나 5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전도적 초청이 있었다는 증거가 희박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첫째 전도열이 크게 상실되었다. 실제로 복음전도가 복음전도의 구실을 다하지 못했다고 본다. 공적 초청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부활되었다. 1760년 이후 분리 침례교파와 초기 감리교파에서 공적 초청을 시작했다.
18세기에 미국에서 회중교회 Jonathan Edwards(1703-1758)를 비롯하여 George Whitefield(1714-1770)는 대 각성 운동을 전게하는 한편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 David Brainerd(1718-1747)가 사역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감리회를 창설한 John Wesley(1703-1791)과 감리회원들이 공개 초청(the public invitation)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기 위해 앞으로 초청하는 것은 신앙부흥운동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 감리교에서 제단 앞으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라벗 콜만(Robert Coleman)은 『미국 감리회 제단으로의 초청의 기원 (The origin of the altar call in American Methodism)』을 통하여 1798년 메리렌드 감리교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제단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도록 하는 공적 초청을 최초로 시도했다고 했다. 당시의 한 지도자인 저시 리(Jesse Lee)는 그날 밤 집회에 관한 일기에 ‘설교자가 초청하자 수많은 남녀가 자비석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있을 때 한 찬양대원 이 노래를 하고 있는 동안 설교자는 이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참회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간곡히 권면하고 회개인들 중 두세 사람이 평화를 얻을 때 이들 위하여 대표 기도를 드렸다’라는 내용을 기록했다.
콜만은 감리교에서 존경받는 설교자 헨리 보옴(Henry Boehm)의 체험적 물증으로 1800년대부터 최초 참회석 사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00년 초기에 메릴랜드에서 순회 부흥회를 인도하던 윌리엄 캔들(William P. Chandler)가 효과적으로 영혼들을 모이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부흥회 기간에 17명의 구도자가 참회석에 나와 무릎을 꿇었던 자들이 신속하게 변화되었다’고 했다. 1790-1865년에 유럽의 부흥운동가로 활동했던 리차드 칼월든(Richard Carwardine)은 『대서양의 부흥(Transatlantic Revivalism 1790-1865)』지에 기록하기를 1801년 1월 25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조지 감리교회의 리차드 스니즈(Richard Sneath) 목사로부터 강사 초청을 받아 전도집회를 인도하던 중 청중을 결심자는 성찬상 앞으로 나오라고 공적 초청을 했다는 내용이 초기 교회의 예라고 했다. 그 후 콜만의 기록에는 스니즈 목사는 집회의 결과를 기록할 때 체험한 내용을 설명하기를 “강사가 설교를 마친 후에 나는 성찬상 앞에 있는 참회석으로 나오라고 초청했고 특히 우리는 참회석으로 나온 이들을 위해 자세히 기도해주었다. 여기서 나는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때 방해되는 부끄러움만 제거한다면 이들의 신앙 훈련에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30명의 개심자 가운데 26명이 신앙공동체와 결합되었다. 콜만은 그후로 제단으로 초청하는 사역이 감리교회 안에서 사실상 보편적으로 준수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미국 기독교 사전(The Dictionary of Christianity in America)』에 참회석 활용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그 기원을 밝혔다. 1801년 여름 켄터키 케인 루이쥐(Cane Ridge) 집회에 참석한 25,000명의 회중을 향하여 감정적으로 호소한 후 참회석을 베풀었고 영성 운동을 위해 주기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감리교 세계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world Methodism’)』에 따르면 여름이면 감리교의 참회석에 나가 치유를 받으러 25,000명이 케인 루이쥐 집회에 참석했다고 하므로 참회석 사용의 기원은 1800년대라고 볼 수 있다. 백과사전에 참회석의 의미를 분명히 밝혔다. 초기 부흥집회 때 강사가 서있는 강단 앞부분에 삼면에다 나지막한 울타리를 설치해놓고 강사가 구도자를 울안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무릎을 꿇도록 한 후 설교자는 침회석으로 나온 자들과 회중을 위해 기도했다. 구원의 기쁨을 얻도록 하고 그들의 죄를 참회하도록 하는 처소이다. 참회석 사용할 때 때때로는 제단에서 발생하는 불손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사용하도록 했다. 밤낮으로 참회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과 불안해하는 이들이 안심하고 철야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불로 환하게 밝혔고 남녀와 구별하기 위해 커튼을 쳐놓기도 했다.
카워다인(Carwardine)에 따르면 1806년 뉴욕 폴사이트 감리교(Forsyte Street Methodist Church)의 아론 헌트(Aaron Hunt)는 야외집회를 주선할 때 강단 정면에 단(altar)을 마련하고 집회에 참석한 자들과 회개석을 베풀 때 참회 기도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준비했다. 1811년 회중교회에서 사역하던 칼빈주의 설교자 에덷솔 네들톤(Asahel Nettleton)도 사용했다. 구도자에게 제단 앞에서 공개적으로 결심하도록 초청했다. 칼빈주의자가 인도하는 1822년 워싱턴 부흥회에서 장로교회에서도 감리교인들의 관습과 찬송을 소개했다. 회중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감리교의 찬양을 부르며 참회석 앞으로 나오도록 초청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큰소리로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통성 기도하라고 했었으나 성직자에 의해 공적 예배에서는 금지되었다. 5년 후 조지아주 남부에서 유사한 관습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로교회 내에 숨겨진 개심자들과 미등록자들을 위해 감리교와는 좀 변형된 회개석을 사용한 기록들이 있다.
침례교 역사가인 윌리엄 디에번(William Devon)은 분리 침례교인들이 예배 시에 초청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설교를 마친 후,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가 적합한 찬송을 부르면서 형제들 사이를 두루 다니며 악수를 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동안 회중이 스스로 불쌍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방법을 묻는 사람에게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게 했고 혹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하여 그들의 개종을 위한 기도를 함께 드리도록 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내적 반응의 공개적 선포를 호소하는 초청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복음에 대한 반응을 호소하는 초청은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게 되였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참회의 자리」(Mourner's Bench)를 마련하고 회개인들이 그 자리에 나와 엎드리도록 했다. 피터 맥캩지는 예배 후 반드시 기도회를 갖고 강단 아래에 마련한 자리에서 남녀 신자들이 울며 고백하고 기도하게 했다.
특히 대서양 연안에서 개최되었던 장로교내에서 부흥운동을 이끌던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는 1830년 미국 락세스터(Rochester)에서 복음전도집회를 인도하면서 호소가 극에 달하게 될 때 감리교 양식과 비슷한 제단인 ‘열망의 자리’(anxious seat)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락세스터 집회를 상기하면서 ‘나는 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끊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자원하는 심령이 될 때 초청하도록 했다. 그들이 제단 앞에 마련된 좌석에 나와 기도하도록 했다.’고 그의 부흥회 강의 안에 그 효력에 관한 개요를 언급했다. 교인 가운데 영적 상태를 걱정하는 분들이 들어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열망의 방」(Anxious Rooms) 제도를 열망의 의자, 혹은 열망의 자리로 바꿔 회중들이 그들의 영적 욕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상담할 수 있도록 했다. 열망의 자리에서 기만하는 수단, 피해망상, 그릇된 소망은 버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고 결단하고 솔직히 인정할 때 나오도록 했다. 자신이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의 양심에 의해 앞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잘못된 망상에서 벗어나 위장된 개심을 예방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도록 했다.
칼윌든은 맨체스터와 헌팅던셔주에서는 감리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영적 친교의 자리인 열망적으로 묻는 자들을 위한 모임을 분리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공개적으로 손을 높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결심하도록 했다. 아무튼 ‘열망의 자리’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휘니(Finney)가 영국에 집회를 시작하던 1849년에 열망의 자리는 널리 보급되었다. 칼윌든은 1830년대에서부터 1840년대까지 열망의 자리(penitents’ form)를 사용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1830년대부터 휘니(Finney)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칼빈 콜튼(Calvin Colton)은 대서양을 건너간 부흥사 중에 한 사람인데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회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사용했다.
1832년 영국에는 칼빈 콜튼(Calvin Colton)의 저서 『미국 부흥의 역사와 성격(History and Character of American revivals of religion)』을 통하여 열망의 자리(anxious seat)를 사용하여 무릎을 꿇었다는 내용이 있다.
모르간(G. Campbell Morgan)은 「별실」을 두어 집회 후에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개심자들을 그 방에서 인도하게 했다. 얼(A. B. Earle)은 처음으로 전도적 초청에 카드를 사용했다. 그는 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한 회중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헌신한다는 표적으로 카드에 서명하도록 했다.
무디(Dwight L. Moody)는 「질문실」을 만들고 사람들을 초청해서 질문자와 상담자간의 토론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방으로 질문자가 차례로 인도되었다.
이러한 방법들은 대중 전도의 역사상 최초의 공적 반응과 사적 상담의 가장 큰 효과를 병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바와 같이 자비석(Mercy Seat) 사역은 구세군의 도구가 되기 전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점을 통하여 자비석이 사역이 구세군의 전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동부런던 기독교회 초기 마일 앤드 웨이스트에서부터 개심자를 위해 사용했었는데 이는 구약 지성소의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로부터 시작하여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웨슬레의 참회의 자리를 거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부스(William Booth)가 23번째 맞이하는 (1852년 4월 10일)생일날에 그의 세속적인 직업을 버리고 구령전도 사역에 투신키로 결정한 날부터다. 장형일 부령은 “자비석은 구세군의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비석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인데 지금도 구세군에서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계속 이루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