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주신 이유
홍성효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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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갈라디아서5: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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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자유를 주신 이유”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에로 부름을 받았으니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갈라디아 5:13)
하나님의 뜻은 악하고 종교적인 이 시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체의 방종에 빠지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형제들의 자유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형제들을 헬라어로 아델포스 (ἀδελφός)라고 하는데 아(ἀ)는 한 분이라는 의미며, 덜포스(δελφός)는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곧 형제입니다.
우리들이 구세군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상징하는 구세군기 아래서 자궁과 같은 자비석(mercy-seat) 앞에서 회개하고 혈화의 신앙으로 성장한 요람에서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구세군 병사로 서약한 한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구세군 병사들이 받은 자유는 헬라어로 엘류데리아(ἐλευθερία)는 첫째로 율법으로 부터 자유, 둘째로 죄에서 자유 그리고 셋째 사단의 노예에서 자유를 의미합니다(벧전 2:16, 고후 3:17).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3:31). 우리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영적 자유를 얻은 후 죄악에 접근한다면 하나님의 속죄 사업의 본의를 무시하는 죄까지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자유를 주신 것은 방종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신 “육체”는 헬라어로 ‘사르크스(σάρξ)’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합니다. 관능적인 육체의 잠재적인 과잉에 빠져 방종해서는 안 됩니다(롬 3:8, 6:1-2, 갈 5:16-17, 벧전 2:16, 벧후 2:19, 삿 1:4).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형제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육체적 방종을 피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형제들 끼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서로 섬기면서는 헬라어로 둘리오(δουλεύω) 살아가기를 소망 하십니다.
사랑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자들은 자아와 육체에 대하여 죽어야만 이 일이 가능함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섬기려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단순히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종노릇하는 새로운 형태의 섬김과 책임감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서로 섬겨야 할 이유는 방해받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이며, 권력과 지위에 대한 동경이 아닌 상호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하게 될 때 선교 공동체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19).
둘리오(δουλεύω)라고 하는 원어는 서로 노예가 자신을 부정하고 주인이게 섬기듯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너무도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사랑’ 앞에 정관사가 쓰였는데 그것은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오직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 5:5). 정말 놀랍게도 ‘섬김’이라고 번역하는 그리스어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자율적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서로에게 ‘종 노릇’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섬김이고, 그의 옳은 소욕이나 옳지 않은 소욕에 종처럼 맹종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불의한 소욕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이 그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상하 관계에 있을 때 위에 있는 형제의 물욕에 따라 아래 형제를 율법을 행하게 하고 노예적 심리로 행한다면 피차를 위하여 과감하게 그 임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니고 맹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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