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의 길 전도(가로전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홍성효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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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누가복음14:2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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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구세군의 길 전도(가로전도)는 언재부터 시작되었는가?
옥외는 종교 영역 이외에도 수많은 대 운동의 발생지가 되어 왔다. 스코틀랜드의 라버트 카닝햄 그래햄(Robert B. Cunningham Graham)은 매일 밤길 모퉁이에 서서 메시지를 전파하던 사회주의의 선구자 켈 하디(Keir Hardie)를 바라보았던 당시를 회상하며 “그 당시 나의 메시지를 들어줄 두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한 청중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영국의 정치가요 초기 노동당 지도자인 켈 하디(James Keir Hardie, 1856-1915)는 9월 26일 그레스고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생애가 실패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그 후 50년 동안 영국 정치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초를 닦아 놓게 된 것이다.
많은 대도시가 옥외 토론을 위해 연설자의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다.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주제와 다양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들이 태양빛 아래 모여서 연사들이 내뿜는 의견들을 듣는다. 옥외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구속감을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에 우주적이며, 경계가 없으므로 자유로운 곳이다. 클럽이나 교회 혹은 구세군 회관은 일반적으로 문을 닫는 데 비해 문밖에는 그와 같은 제한이 없어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극장이나 사회 기관이나 빙고 홀이나 대성당이라 할지라도 옥내 집회 장소는 같은 관심 또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만으로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옥외는 다양한 모습과 조건을 갖춘 모든 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고 본다.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 목적과 경고 그리고 관심을 처음으로 표명하셨던 곳도 옥외다. 구약 시대의 아모스 선지자가 벧엘에 모인 군중들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주변 이방 민족들이 지은 죄악을 비난했던 곳도 옥외였으며,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했던 곳도 옥외였다.
신약에서도 세례 요한이나(마 3:1), 예수 자신이 옥외에서 가르치고 설교하셨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마 5:1). 예수의 첫 번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유대인을 두려워하여(요한 20:19) 숨어 있었으나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안으로 잠겼던 빗장을 열어젖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얻어 설교를 하였을 때 그날 3,000명이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행 2:14-42).
예수께서 옥외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승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막 1:9-11), 옥외 사역을 하시다가 마침내는 뜰에서 체포를 당하셨고(막 14:32-46) 옥외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막 15:21-41)는 사실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와 그 후 현현은 뜰과 엠마오로 가는 길(막 16:12-13, 눅 24:28) 그리고 바닷가와(요 21:1) 같은 옥외에서 일어났다. 그의 승천도 감람산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행 1:11)이라고 전했던 곳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님의 생애에 나타난 주요 사건들이 옥외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려는 하나님 전략의 일부였다는 것 만은 분명하다.
예수 자신은 자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지키던 규율이나 관습을 단호히 거절하심으로서 죽음에 이르게 되셨다. 마구간에서의 탄생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곳에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시작 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행하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의미한 수많은 규율과 절기들로 유대 민족을 가두어 둠으로써 그들이 겪어야 했던 영적 폐쇄 공포증을 제거 시켜 주셨고 모든 인류를 위한 주님의 목적을 이루고 계셨다.
그 병 증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안식일에는 누구도 2,000큐빗 이상 걷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날에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묶거나 풀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아픈 목도 부드럽게 하기 위해 한 번에 꿀꺽 삼킨다면 식초가 사용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양치질하듯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날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 흰 머리카락을 보면 그것을 뽑아야겠다는 유혹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안식일에는 불을 켤 수도 없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발생할 경우에 의사를 부를 수는 있지만 의사가 환자의 골절에 손을 대서는 안 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손이나 발을 삐었다 할지라도 그 부위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질문조차 있었다.
우리는 예배의 장소로서 옥내가 합당하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을 사면이 벽으로 된 교회 당이나 구세군 회관에 제한 시키겠다는 인상이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첫 번 부활절 아침 예수의 시체 위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도착했던 여자들이 예수는 무덤이라는 제한된 곳에 갇혀서 계실 분이 아니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누가 24:1~5).
초기의 구세군인들이 구세군의 회관(Hall)을 「병영 혹은 막사(Barracks)」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확실히 균형 잡힌 영적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의 궁극적 목적은 그 병영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처음 구세군인들은 이런 점을 알고 있었다. 죄인들이 옥내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병영」은 우선적으로 악과 대항하여 싸워 죄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진군을 위한 영적 갱신과 중보기도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구세군인들이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들 중에 많은 개심자들이 구세군 병사들이 되자 윌리엄 부스는 그들의 병영 안에서 만족하고 안일하게 정착하려는 위험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성장해 왔고 또한 그들에게 찾아 나아가야만 하는 구세군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접촉하는 데 실패한다면 새로운 방법들을 창조해 내야만 할 것이다.” 라고 경고를 했다.
「그리스도가 겪은 위기들」이 대부분 옥외에서 일어났던 것을 재고하면서 구세군 회관이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매우 중요한 활동 무대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장소는 최선의 기능을 준비하고 중보 기도하는 처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중보 기도를 하기 위해서 무리로부터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다. 그러나 그분은 생애의 대부분을 사람들과 함께 보내셨다. 주님은 수많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접촉을 하셨는데 그는 인격적이며 영적으로 접촉을 하신 사람들 중에 사마리아 여인이나 삭개오, 시각 장애인인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이 십자가 위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도 그의 곁에서 죽어 가는 강도에게 까지 놀라운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옥외에서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의 관계를 한 사례가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전도 하셨다.” 라고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는 산 위에서 무리들에게 그의 유명하신 설교를 하실 때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야외에 있는 주변의 사물들 즉 공중에 나는 새들과 들판과 밀알 등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다.
예수는 탁월하신 옥외 설교가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심으로 그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제일의 목적을 가지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최후로 위임하신 임무는 전 세계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감람산 즉 옥외에서 명령하신 말씀이다. 그 명령은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해당하는 것이다.
최초로 「동 런던 기독교 선교회」(The East London Christian Mission) 시절에 「동 런던 전도자」(The East London Evangelist)라는 기관지 1868년 12월호에 가로전도에 관해 특별히 언급했고 「가로전도의 기능」에 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실었다.
“우리는 가로전도 사역을 최초로 우리만의 영역으로 여겼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처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영적이며 영생에 관한 것에는 전혀 무관했고 주일 날 거리를 방황하는 군중 때문이었다. 그들과 점차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이 비록 교회에 대해 대단한 반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성실과 애정이 깃 들인 태도로 성서의 진리를 전하는 자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들은 메시지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1880년 구세군의 어머니는 「사관 학생 훈련」이라는 글에서 “이 훈련은 강의실에서 이론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군중이 무지하므로 죄를 범하여 슬픔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실제로 접촉하므로 써 가능한 것이다. 응접실에 놓인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여’ 라고 노래하면서도 전혀 이를 실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감상적인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감상 주의에는 분명 부활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수의를 입은 채로 썩게 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구세군의 6대 대장인 앨버트 오스본(Albert Orsborn, 1946-1954)은 “우리는 강단으로부터 내려와서 인류의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모순과 맞부딪쳐 싸워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복음 성가에도 “거리나 골목이나 어느 곳이든 우리의 큰 집회 장소는 옥외라네” 라는 가사 내용이 있다. 이 가사가 약간 밝은 분위기로 들려졌다면 그것은 군대의 병사들이 행군을 할 때는 부대가 종대로 열을 짓는 습관처럼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반대와 박해에 부딪혀도 행군할 때마다 노래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가로전도의 사역 도중에 일어났던 사건인데 구세군 역사에 몇 명의 병사들의 보고가 기록되었다. 길드 포드에 있던 사관 부인은 경찰서에서 불과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 무의식 상태가 될 때까지 맞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또 다른 여자는 너무 심한 상해를 입어 일주일도 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서쌕 지방의 쉬어햄에 거주하던 사관은 돌에 맞아 죽었다. 달구어진 석탄과 타오르는 유황이 런던 화이트 채플에 있던 윌리엄 부스의 추종자들에게 던져졌을 뿐만 아니라 폴크스톤에서는 썩은 생선과 돌덩이가, 올버햄톤에선 석회가 날아왔다.
1882년에는 브리테인 거리에서 만도 거의 700명에 가까운 구세군인들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발길에 채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중에 23명은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부스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1882년 1월 그는 자기의 부인 캐서린과 쉐필드로 가는 계획을 세우자 구세군의 지도자는 그 도시를 통과할 때 대 행렬을 배치하도록 했다. 이는 지방의 악한들에게 대단한 도전이었다. 「쉐필드의 검객」 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모여 이 행렬을 저지하기로 계획했다.
그 행렬에는 취주 악대를 실은 커다란 짐마차가 있었고 흰 말 위에는 사관이, 4륜 마차 안에 윌리엄과 캐서린 부스가 앉아 있었으며 그 뒤로 구세군 제복을 입은 구세군인들 이 질서 정연 하게 열을 맞춰 행진하며 따랐다.
도로에 수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썩은 채소, 돌멩이, 막대기, 진흙 등을 닥치는 대로 들어 던지기를 했던 그들을 구세군의 행렬을 구경하려고 나온 구경꾼으로 여겼다. 이 행렬에 참석했던 구세군인들 은 그 악한들이 저지른 일들을 똑똑히 목격했으며 당시의 경찰관들은 구세군인들을 보호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폭도들은 말 기수의 양 눈 사이로 돌멩이를 던졌고, 그의 머리에 벽돌로 심한 부상을 입혔고, 몽둥이로 그의 등을 내려 갈겼다. 그리고도 그 폭도들은 그를 말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윌리엄 부스는 일어서서 병사들에게 계속 행군 하라고 명령했다. 악기가 부서지고 구세군인들의 제복은 피와 진흙으로 얼룩졌지만 그들은 계속 행군을 했다. 그 행렬이 공중 집회 장소인 앨버트 홀에 도착하게 되자 윌리엄 부스는 병사들에게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제 여러분의 사진을 찍을 시간입니다’ 라고 농담을 했다.
구세군인들이 법을 어기고 있다고 고소한 사람들은 영국 법정에 나와 자신들의 고소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증언했다. 이로써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많은 구세군인들이 벌금을 부과 받게 되었으나 그들은 이를 지급할 능력이 없었다. 어떤 구세군인은 설사 벌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이에 응하지 않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1884년 한 해만 해도 600명이나 되는 구세군인들이 투옥되었다.
트루로의 한 사관이 거리에서 콘체르티나를 연주했다고 감옥에 갇혔고 존 바디 사관은 스톡톤에 있는 시장에서 코넷을 연주하다가 붙잡혔다. 요크에서 한 여사관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으며 펜잔스에서는 55 피트 폭의 길을 일렬 종대로 행군할 때도 많은 피해를 봤다.
투쟁이 극도에 도달했을 때 윌리엄 부스는 “그들이 우리에게 벌금을 부과 시키고 투옥 하는 일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우리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창립자 윌리엄 부스가 언급한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Never)" 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구세군의 가로전도 사역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더 많은 나라에 불을 붙이면서 여전히 확산하고 있는 구세군의 가로전도의 사역을 위해 사실상 이 말은 예언자적인 말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 신분, 신조 혹은 지위와는 상관도 없고 편견도 없는 구세군의 가로 전도 사역에서 얻어진 가장 값진 결과 중의 하나는 1967년 8월 어려움으로 분열되어 있던 북아일랜드 당국으로부터 주어졌다. 그 달 18일 BBC 뉴스는 “모든 옥외 집회와 행군이 일 개월 동안 북 아일랜드에서 금지되었으나 구세군만은 이에서 제외된다.” 라고 알렸다.
가로에서 복음을 전할 자유를 우리가 보장 받기까지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치렀던 대가를 기억하면서 가로전도 사역을 최대한으로 선용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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