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초장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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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친구에게
손연숙 2007-01-03 추천 1 댓글 0 조회 344

성탄을 며칠 앞둔 오후였다. 저녁에 개인적으로 외출할 일이 있어 밀린 집안 일과 챙겨야 할 것들을 준비해 놓고 한 시름 덜며 오후의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 연숙아, 정혜야. 별일없니?" 언제나 그렇듯 가끔 걸려오는 전화지만 담담한 친구의 목소리다. "  너 어떻게 집에있어 지금? " 계속되는 친구의 말. " 응, 이따가 나가봐야돼. 근데 웬일야, 무슨일있어?" 내 대답.

" 이이 기집애, 너 오늘 우리 만나야 돼. 희섭이 만나기로 했어."  " 누구? 희섭이?" 내 목소리가 전화기 넘어로 32평 짜리 내 아파트멘트를  쩡~ 하고 울리는 듯했다. " 그래, 희섭이. 다니러왔대. 지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있어. 오후3시야. 나올래?" 숨도 안쉬고 지껄이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내 머리속은 바로 50년전의 추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윤희섭! 죽마고우라고 하는 말로 한 친구를 뽑으라면 당연히 불리워야 할 이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 12살 때헤어진 친구. 대대로 양반가문의 자부심을 가지고 어려운 살림에도 자녀들을 서울로 유학보내고 살던 집이었다. 방학때면 7남매 중의 아들 하나인 오빠와 그 위 언니가 세라복 교복을 입고 집에 내려와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걔네집 창고에 소금 가마니를 가득 쟁겨놓고 팔았고, 또 담배도 팔았는데 언제나 파는게 아니었고 배급이 나오면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마치 구걸을 하듯이 담배를 사가던 모습이다. 그 때는 주로 잎담배를 피웠을텐데 지금처럼 담뱃갑으로 나온 것은 매우 귀해서 마치 배고픈 군중이 먹을 것을 기다리듯 추운 겨울에도 걔네집 문앞에 줄지어 서있던 시골 노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또 왜 소금이 그렇게 귀했는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는다.

마치 쌀가마니처럼 싸놓고 한되씩 두되씩, 배급 타가듯 사갔었다.

 

희섭이, 한 마디로 나를 무척이나 괴롭히던 친구였다. 말도 잘하고, 거짓말도 아주 진짜처럼 잘했고, 특히나 교회다니는 나를 얼마나 조롱하고 무시했는지 모른다. 대대로 불교집안인 친구는 무조건 불교가 제일이라고 하면서 많은 친구들 앞에서 교회다니는 아이들을 완전 묵사발을 만들곤 했다. 언제나 그렇듯, 바보같았던 나는 늘 그 친구에게 눌려서 말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괴로워했었다.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층계에 앉아 재잘거릴 때도 그 친구는 늘 사람 염장질르는 소리를 잘하곤 했다. 그 때는 가끔씩 시골의 하늘위에도 무슨 종류인지 모르지만 비행기가 하얀 거품을 꼬리에 달고 날아 지나가곤 했다. 그 때면 희섭이는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 난 이담에 저런 비행기타고 미국에 갈거다." 미국이 어디 붙었는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인지 조차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미국에간다고 계속 뻥을 치는(?) 그 친구의 큰 소리에 아무도, 소위1등을 하는 똑똑한 아이들도 아무 소리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각자 무슨 생각들이 있었겠지. 나도 속으로 다짐했으니까. " 너만가니? 네가 미국가면 나도갈거야."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밖으로 표현하는 그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그 기억은 생생하게 내 마음과 머리 속에 남아있다. 한 마디로 그 친구와 나는 라이벌이었다. 함께 어우러져 뒹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로를 경계했던 그런 관계였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하며 반 평생을 살아온 사이였다. 일제고사를 볼 때는, 공부하는 것 표내느라고 내가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곧 신작로 건너 걔네 집에서도 응답이 왔다. 더 큰소리로.....친구가 말했다. " 네가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면, 어머니가 얘, 연숙이 공부한다. 너도 공부해라." 하셨고 그러면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달 밝았던 가을의 밤을 휘영청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살던 어느날, 걔네가 갑자기 이사를 갔다. 서울로~

 

작년엔가 내가 시카고엘 다녀왔더니 희섭이가 한국에 와서 몇몇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는 얘기를 정혜로 부터 듣게되었다. 그렇게 자기자신에 대해헤 노코멘트로 일관하며 베일로 꽁꽁 묶었던 친구가 실로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옛 친구들을 찾았다는 얘기다. 그리곤 올해, 오늘 나를 만나고 싶단다.

정신없이 뒷일을 마무리하고 전철에 올랐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1726호,  

영낙없는 60대초의 미국 아줌마가 된 친구는 나를 눈물로 맞아주었다.    

거의 3시간여 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쭉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있는 집안에 아무 배경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시골뜨기 소녀가 시집 가서 격은 눈물겨운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를 얼싸안고 어쩔줄 몰라하던 친구의 모습이었다. 완전히 하나님의 딸로 변해있었고, 소위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내 모습을 보고 감격을 주체못하며, 맛있는 저녁을 사 주면서 혹시나 우리가 돈을 낼까봐 조금은 촌스러운 모습으로 미리 값을 치르던 순진한 모습! 

옛날의 깍쟁이 같았던 친구는 없어지고 그저 50년전의 시골뜨기 소녀로 우리 모두는 입에 거품을 물었었던 행복한 오후였다.

 

헤어질 때, 풍성한 밤색 코트에 자그만 몸을 담은 채, 발길을 돌리지 못하며 외로움의 그림자로 삼성역 지하도에 서 있던 내 친구 희섭이............

( 희섭아! 너 나한테 한가지 말 안한거 있지? 차마 그것만은 말 안하고 싶었을 거야. 나 너 충분히 이해한다. 아마도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에, 네 아픔과 외로움이 너를 놓아줄 그 때, 우리 한번 다시 만나자. 그 때까지 나도 너의 마지막 남은 그 자존심 지켜줄게. 하나님께 막힐 것 없이 우리 깨끗이 살자. 하루 하루를 감사하면서 말야. 희섭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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