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령의 모놀로그

  • 교회소식 >
  • 향령의 모놀로그
30년만에 눈물의 고백
김소인 2007-11-03 추천 0 댓글 0 조회 2259

때는 1992년도였다. 내가 아동복지시설인 군산후생학원이라는 일터에서 낡은 건물을 모조리 걷어내고 그 자리에다 현대 빌라식 아동시설 건물을 새로 들어 앉히던 그 무럽에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우선은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양해를 미리 구한다. 다름아니라, 이제로부터 글 내용상에 등장된 모든 명사(名詞/이름씨)를 부득이 영어의 이니셜(initial)로 처리하기 때문에서다. 그것은, 무엇보다 실존한 인물 그들의 사회생활에 혹여 누가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이 선 까닭에서다. 

 

본론이다. 맑은 가을날의 오전 10시경, 서을 강남에서 너무나 이름난 C산부인과 전문 병원의 의료과장 J박사가 돌연히 내원하였다. 그 J박사 그는 한국동란 직후인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1954년 군산후생학원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리하여 그 곳에다 스스로 온몸을 내맡긴채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미움, 건강과 아픔,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쌍곡선 판세에서 갈길 찾아내며 자랐다. 그런 연고로, 그곳 출신이면 그 누구나 매한가지 심정일터이지만 J박사로선 더욱 그 군산후생학원이라는 명명의 터전은 언제나 마음 한복판에 고스란히 부각된 정든 고향지대다.

 

해서, J박사는 그 곳 후생학원 노후시설을 헐고 신규 건물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는 그 소식에 접하자 무척 궁금히 여겨 짐짓 틈 내어 불쑥 찾아 온 것이었다. 한참 후배가 되는 아동들에게 전달할 선물까지 정성스레 마련해서였다. 그 당시엔 일반 가정집 역시 대개 같은 처지이거니와, 더구나 아동복지시설은 도무지 컴퓨터란 구경조차 잘 못하던 때인데, 그 귀한 대형 기기를 차에 싣고 왔던 것이다. 

 

그래, 나는 그 기기가 든 무거운 판지상자를 옮기는데 함께 거들며 너무 반갑기도하고 고마워하며 맞았다. 그러면서 나는 한잔의 차라도 어서 나눌 양으로 사무실에 이내 들자고 권유했다. 하긴, 사무실이라야 건축 중이라서 합성수지 비닐로 겨우 하늘 가리고 비바람만 막은 노천이나 다름없는 데였었다. 어찌되었건, 그 때 그 J박사는 나의 사무실에로 향한 행보에 잠깐 마다하며 먼저 신축가운데 있는 아동숙사부터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안내를 쾌히 시작하게 되었다.

 

한데, 그 안내를 받던 그 J박사는 감격과 회상에 가슴 벅차서 그런지 잠시 걸음을 멈칫거리더니 눈물 괴인 눈빛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이어 이모저모 토목 일꾼들의 건축진행 솜씨 상황을 일일이 마저 둘러보았는데, 나 또한 덩달아 주책없이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 순간, 나는 격한 감정을 달랠 겸 또 분위기도 전환코자 하여 내 손목시계를 보란 듯이 가리키며 이젠 그만 관찰하고 어서 밖으로 점심하러 나갈 때가 되었다며 딴청으로 말머리를 꺼냈다.

 

그랬드니, 그 J박사는 곧 손사레 치며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점심을 내고자 몇일전 결심하고 여기 일부러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원장님 이외 모실 손님이 더 계십니다. 그분네들은 나의 B중학교시절 은사이신 교장님, 교감님 또 담임선생님이 십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원장님이 저의 간청을 들어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J박사가 원하는바 그대로 그의 승용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어 시내 모처에서 매우 유명하다고 소문 난 한 음식점에 다다랐다. 알고보니 그 날 그 점심시간대에 동석할 분들과 그 음식점 장소 지정은 J박사가 서울에서부터 벌써 빈틈없이 내정해서 예약하고 또 통보해 놓은 그 결과로서 착착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그 정오 회식에 참석한 수효는 나를 포함하여 모두 5인이 됐었다. 물론 수인사 절차를 거쳐 주문한 특식이 가지런히 정갈하게 나왔고, 그 식사 마치자 이내 격식에 의해 따뜻하고도 그윽한 향내 짙은 차가 하얀 사기잔에 따라져 각기 앉은 좌석 앞 식탁 위에 다소곳이 내놓아졌다.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그 J박사의 스승 세분 모두는 이미 은퇴한 처지이지만, K라는 전직교장이 그 중 대표로 나서선 마침내 중대 고백이 있다면서 J박사의 손을 새삼 다시 뜨겁게 맞잡드니 이렇게 진실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그야 자연히, 다른 두분의 선생마저 함께 일어서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하고, 말을 잇어 가는 내용의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J박사가 소년시절 B중학교에 입시를 치루고 입학한 성적 순위는 전 응시생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1위였다는 것이다. 그랬건만, 이를 학교측 교장과 수하 교직원들은 곧이곧대로 올바르게 발표하지를 않았다. 그 실책때문에 반백의 나이가 되도록 늘 부끄럽고 괴롭게만 살았으니 이제라도 그 과오를 뉘우치며 J박사에게 고해성사하듯 직고하자고 의견일치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수순을 K전직교장이 진행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그 과오란 도대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짚어본다. 분명히, 그 과오 사유 내막은 주인공 J박사도 전혀 모르게 실로 오랜 동안 깊이 감춰져 있었다. 그렇게 된 근원적 문제가 있었다. 그 첫번째, 온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나 <일개 고아원아이 따위>가 1등으로 입학했다니 그 자체야말로 자존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을뿐더러 다른 입학생들에겐 치욕적 수치를 크게 안겨준 꼴이 되므로 이를 꼭 취소할 것. 그리고 그 두번째, 교직원 간부회의에서조차 학교명예 관계상 차선책을 선택하자는 그 결의이다.

 

그로인해 하는 수 없이 입학자명단 발표에서 J박사 입학 성적 순위를 2등으로 격하 조작하여 공고문을 만들어 교내 곳곳에 게시했다는 것이다. 그 연후, B중학교 실체에 관한 선전 그 일환책으로 J박사를 언론기관에서 취재보도토록 조처했다고 한다. 그 희망 목적 계책은 그대로 적중하여 지방 일간 신문 및 방송에서 고아원 원생이 B중학교에 입시 전체 학생 중 성적 2등으로 영예롭게 합격, 입학했다는 그 토픽(topic) 소식과 더불어 B중학교를 대대적으로 싸잡아 센세이션널(sensational)하게 뉴스거리로 올려 놨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참조로 인식할 사항이 있다. J박사가 B중학교에 입학하던 그 시절엔 오늘날의 중학교 입학절차 순조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서 매우 고난도의 실력 경쟁이 치열했다는 그 사실에 관해서이다. 그 당시엔 어느 학생 누가 중학교에 응시, 입학 되었다하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무조건 열광적 박수와 치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만큼 중학교 입학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니, 항차 복지시설의 천애 고아인 J박사가 B중학교에 그 것도 성적순 1위로서 당당히 들어갔음에 이르러서이랴. 

 

이젠, 그 일련의 사건은 30년이나 묵고 지난 옛 세월에 저지른 과오라며 그냥 지나칠 만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건관련 B중학교 K교장과 교직원은 비록 우연한 회식 자리에서나마 그 과오를 철저히 청산하려 하여 피해 당사자인 제자 J박사 앞에서 머리 숙여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통렬히 성찰, 용서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흡사 교실 한쪽에서 벌 서듯 내내 기립자세 유지하던 그 선생 모두의 눈가에선 어느 새인가 한결같은 가는 이슬이 값지게 맺히고 있었다.           -  끝 -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어느 친구 딸의 항변 김소인 2007.11.16 0 1886
다음글 (2)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야 마땅하다 김소인 2007.10.05 0 1146

03737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476 구세군빌딩 12층 TEL : 02-831-0201 지도보기

Copyright © 구세군푸른초장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4
  • Total92,028
  • rss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