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해설 : 김원호 집사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 당선
1984년 제 30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 시간의 바다
불의 이야기
행복한 잠
집필 의도 및 감상
김현승(金顯承)의 초기 시는 청교도적인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독'과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하여 참된 신앙의 결실이 이루어지기를 이 시는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시 <가을의 기도>는 김현승의 어떤 시보다 기독교 정신의 본질을 잘 파악하여 제시하고 있다. 참된 신앙 생활은 `기도·말씀·찬양'을 병행할 때 이루어진다고 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먼저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로 자기의 염원을 말한다. 그것은 순수한 심적 공간을 `말씀'으로 채워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으로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은 충실한 신앙의 `열매'로 결실되는 것이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절대자가 있는 저 세상에 가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천국 백성'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골방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기도·사랑·고독'에 있다. 이 핵심어들은 각각 `모국어·열매·까마귀'로 형상화된다. 이 시에서 지배적 이미지가 형상화된 시어는 `까마귀'이다. 가장 순수한 새인 `까마귀'를 통해 시적 자아는 자기를 가장 순수한 절대 고독의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기본 이해 항목
주제 : 참된 신앙의 충실과 충만을 기원함.
성격 : 상징적, 종교적, 명상적
어조 : 기도조(祈禱調)의 어조
분위기 :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
사상적 배경 : 기독교 사상
구조 : 형태상 연마다 한 행씩 길어지는 점층적 구조.
이 시의 구성 :
제1연 [기도 - 모국어]
제2연 [사랑 - 열매]
제3연 [고독 - 까마귀]
출전 : <김현승 시초(金顯承 詩抄)> (1957.)
시어 및 구절 풀이
가을 -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면서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시적 자아는 가을을 맞이하여 신앙의 결실과 완성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기도 기도ㅡ 절대자인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를 말한다.
` ~ ' ~ 소서' ㅡ 간절한 기원과 염원을 바라는 뜻을 나타내는 `합쇼체'의 종결 어미.
낙엽 낙엽들이 지는 때 ㅡ 군더더기와 꾸민 것들은 다 없어지고 순수한 본질만이 남는 때.
내게 내게 주신 ㅡ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고 `나'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겸허 겸허(謙虛)한 ㅡ 겸손하고 삼가는 태도로, 이 시에서 분위기가 노출된 유일한 시어이다.
겸허 겸허한 모국어 ㅡ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을 뜻한다. `모국어'는 앞의 `기도'를 실행하는 구체적 방법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참된 신앙심을 행하기 위하여 `기도·말씀·찬양' 이 세 가지를 병행하여야 한다고 한다. 제3연과 연관지어 볼 때 `영혼의 소리'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를 나를 채우소서 ㅡ 세속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을 모두 없애고 난 순수한 상태의 빈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기를 염원하는 참된 신앙심의 기원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 사랑 ㅡ 그리스어로 `사랑'을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로 나눈다. `에로스'는 정애(情愛)에 뿌리를 둔 육체적 사랑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가페'는 신(神)에 대한 사랑을, `필리아'는 우애나 지식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이 시에서의 `사랑'은 `아 가페'를 말한다. 기독교에서 `아가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말한다.
오직 오직 한 사람 ㅡ 절대자, 신(神).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 그 신을 `여호아' 혹은 `야훼'라 부른다.
가장 가장 아름다운 열매 ㅡ 참된 신앙심을 갖게 되는 것. 즉 신앙의 결실.
이 비옥(肥沃)한 시간 ㅡ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고 참된 신앙심을 완성할 수 있는 결실의 계절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앞의 `낙엽들이 지는 때'도 가을을 나타낸 표현이다.
호올 호올로 있게 하소서 ㅡ 기독교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골방에서 정성껏 기도할 때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의 신앙은 예수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 단독자인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고독(호올로)'은 이런 의미의 `고독'이다. [참고] `마태복음' 6 : 6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와 연관이 있다.
나의 나의 영혼 ㅡ `나의 영혼'을 원관념이라 할 때, `굽이치는 ~ 까마귀'가 보조관념이 된다.
굽이 굽이치는 바다 ㅡ 현실 세계의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은 얼룩진 삶을 뜻한다.
백합 백합(百合)의 골짜기 ㅡ `백합'은 성경에서 순결한 믿음이나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 비유되어 왔다. 따라서 `백합의 골짜기'는 현세에서 순수한 신앙을 갖게 됨을 뜻한다.
마른 마른 나뭇가지 위 ㅡ 순수한 본질만이 남는 내세(來世)를 의미한다. 김현승은 자기 시 해설에서 “나의 고독 중에는 구원을 바라며 신(神)에게 두 팔을 벌리는 ......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고독도 있다.”라고 자기 고독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까마 까마귀 ㅡ 이 시에서 `까마귀'는 가장 순수한 절대 고독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것은 시적 자아의 참된 신앙심을 찾겠다는 비장한 결의이며 신앙에 대한 절대적 태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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