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3:1-5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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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니고데모 그가 예수님을 찾은 것은 늦은 밤이었다. 왜 밤을 택하였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당시 그의 신분으로는 예수님을 정식으로 만날 수가 없었다고 본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 즉, 당시 최고법정기관인 산헤드린 71명 회원 가운데 한사람이며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율법에 엄격한 바리새인 가운데서도 지도자, 율법선생이었다. 그런 처지에 당시 유대교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주창하는 집단의 우두머리 예수를 만나는 일은 정말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유대교 지도층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하기로 결의한 것을 봐서 니고데모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몰래 용기를 내어 찾아왔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런 놀라운 일을 누가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 표현에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심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온 주된 이유를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단지 대화의 서두에 불과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으시고 바로 말씀해 주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가 관심을 가져왔던 부분을 아셨다. 니고데모가 궁금해 하던 것은 하나님나라였다. 그는 율법을 잘 알고 어려서부터 엄격히 지켜왔으나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없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매 한가지였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가 과연 어떠한지 알고 싶었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첫째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니고데모의 귀가 솔깃하다. ‘그러면 나도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을까? 근데 사람이 이미 다 커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지?’ “그러면 또다시 어머니 모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절대 불가능하다. 다만 그는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묻고 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오늘날은 의학의 발달로 줄기세포니 뭐니 해서 세포를 떼어내어 복제가 되느니 마니 한다. 머리도 잘라 옮기는 실험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 다시 넣는 실험은 절대 못한다. 다시 태어남은 신앙의 문제니 신앙생활 10년 20년 하면 다시 태어나는가? 헌금을 많이 하거나 교회봉사를 오래한다고 생기는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체득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 말씀하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나라 들어가는데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한다는 거다.
여러분은 왜 교회 다니는가? 부모님이 가라해서인가? 친구 따라서인가?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안정되어서인가? 저는 처음 친구 따라서 다녔다. 만약 하나님나라가 없고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왜 교회를 다니는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여기에 분명한 답을 얻어야 한다.
뉴욕을 방문한 어느 여행객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전광판에 25,30,35,40,45,5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니 엘리베이터가 아무래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진 소년은 참지 못하고 “아빠, 하나님은 우리가 올라가고 있는 것 아시겠지요?” 물었다.
그렇다. 우리 인생이 결국 어떠한지 우리는 알 수 없다. 100년 120년 살아도 이 땅에서만 살 수 없다.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했다. 요 14:2-3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때 준비하신 주님은 우리 처소도 다 준비해 놓으셨다. 물론 사는 것도 힘들지만 이 세상 살만 하다. 그래서 지난 50년은 오래던가? 아니다. 여러분 청년의 기회도 어느 결엔가 곧 가버린다. 정말 빨리 지나간다. 여러분 결혼하고 자녀 키우고 집사고 잘 살면 여러분은 늙지 않을까? 아니다. 백세시대? 좀 오래 살 뿐이다. 결국 다 죽는다. 어디로 가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무도 이 질문에 명쾌하지 않다. 하나님나라? 그것도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의 언어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전혀 다르다. 좋아도 너무 좋다. 그래서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알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경험이 있는지요?
복음전도자 서머필드에게 어느 신학박사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나는 더블린과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니 선생님, 더블린이면 더블린이고 리버풀이면 리버풀이지 어찌 그리 혼동되게 대답하십니까?” 서머필드는 정중하게 “박사님, 저는 육신으로는 더블린에서 태어났고 영적으로는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하였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목사가 된 후에도 여러 해 동안 방황했었다. 드디어 35세 되던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체험하였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목사도 웨슬레처럼 거듭남의 체험이 없을 수 있다. 오래된 신자라고 해도 구원의 확신과 다시 태어남의 체험이 없이 교회 다닐 수 있고 많은 신자가 그렇게 다닌다. 특히 부모님 따라 교회 다니는 모태신자가 영적인 체험이 없기 쉽다.
미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설문조사했더니 모든 교인들이 천국에 가길 희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 25%는 기도를 드려본 적이 별로 없고 35%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으며 40%는 교회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려본 적이 없었다고 하며 75%는 교회직분 맡기를 거부하고 85%는 전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참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주님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해서이다.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지 못해서이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며 주님이 필요합니다.”라는 기도를 마음 간절하게 드려보지 못해서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간 “나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주님 나에게도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내려주세요!” 간구하기 바란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삶에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둘째, 다시 태어남은 영적인 변화를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심을 마음중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면 자신은 철저히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체험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두 가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다. 물은 무엇이며 성령은 무엇일까?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 노래한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로움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가능하다.
<중생의 씻음>이라는 게 뭐냐? 다시 태어나려면 더러운 죄를 다 씻는 회개의 물세례가 있어야 한다. 세례는 죄 씻음을 얻게 하는 표식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죄 씻어 정결해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7) 고백한다. 이것이 거듭남의 고백이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면 주의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려고 힘쓰게 된다. 이것이 다시 태어난 사람의 영적인 변화이다.
이런 영적 체험의 그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온통 내 삶에 드리웠던 먹구름과 폭풍우가 완전히 사라지고 탁 트인 하늘을 보는 기분일까? 아니 그 이상이다. 나의 죄 주의 보혈로 씻음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어 주의 성령으로 충만한 그 순간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장 축복된 순간이다. 여러분 이런 체험 있지요?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인데!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영적 거듭남을 체험한 성도는 보이지 않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작은 천국 이루며 살아간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순간이면 그곳이 곧 천국이 된다. 비록 고통의 현장에 있더라도 혹 맹수에게 내 몸을 내어줄지라도 주께서 함께하시는 순간이면 얼마든지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속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바울은 중생한 자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고 한다. 우리 영혼 안에 옛 사람이라는 옷과 새 사람이라는 옷이 있다. 우리는 두 옷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으려면 반드시 옛 사람을 벗어야 한다.
거듭난 사람은 신분의 변화를 체험한다. 바울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선포한다. 옛사람을 죽이려면 우리 자아를 죽여야 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런 경우 더 무서운 바리새인이 된다.
그러나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면 그리스도가 내 대신 사는 삶이 된다. 그렇지만 예수 믿어도 얼마나 자아가 강한지 모른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은 의로운 양 상대방을 정죄한다. 내가 주인이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이 주인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 우리는 중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 안에 형성되어 자라나고 있다. 중생한 자의 새 생명은 영원하다. 중생한 자는 영생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온갖 죄악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라 주님 앞에 정결한 성도로 서기 쉽지 않다. 사탄이 가만 두지 않는다. 나의 부끄러운, 숨긴 죄도 사탄이 고소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서 회개하자. 무거운 죄악의 사슬을 벗고 새 사람, 거듭난 성도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사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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