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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 2015.10.4.
김동진 2017-04-17 추천 0 댓글 0 조회 269
[성경본문] 요한복음3:12-17 개역한글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밤에 예수님 찾아온 니고데모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은 보였으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몰약을 준비하여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장례를 치른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필경 니고데모에겐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그의 생애에 엄청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눈에 보이는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니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시면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임을 선언한다. ‘Son of Man’하면 사람의 아들로 해석하기 쉬운데 당시 신학적인 배경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된 아들’로 이해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다른 표현이다.

 

왜 이 말을 굳이 하실까?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만이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거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구리로 만든 불 뱀을 장대높이 달아 그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씻은 듯 낫게 해 주셨다.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어 가는데 무슨 풀뿌리나 약초를 던져주신 것도 아니고 장대 위에 높이 달린 그 구리 뱀을 보는 순간에 누구든지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을 베푸셨다.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였지만 이것을 믿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자신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리 뱀이 달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으니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그 이유는 뭘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성경 66권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표현한 말씀이다. 한마디로 사랑이다. 그것도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리 아래에 큰 주머니가 달려 있는 펠리컨이라는 새가 있다. 이 주머니는 펠리컨의 위가 담을 수 있는 양의 무려 3배나 더 담을 수 있다. 펠리컨의 주머니는 먹이를 잡을 때 사용할 뿐만 아니라, 새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도 사용한다. 북극 지방에 햇빛이 잠깐 비추는 몇 개월 동안 먹이를 이 주머니에 저장한 후,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추운 겨울에는 새끼들에게 저장한 먹이를 나누어주어 겨울을 나게 한다. 그러나 추운 겨울나기 전 먹이가 다 떨어지면 펠리컨은 제 가슴살을 찢어 새끼들에게 먹인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준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세상인가?

아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세상이다. 악하고 타락한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지나친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온갖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보내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구리를 녹여서 불 뱀 모양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을 뿐이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온갖 고초당하시며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으니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있을까! 이보다 더 놀라운 사랑이 있을까!

 

다른 종교는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반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먼저 손을 내미셨으니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응답을 믿음으로 설명한다.

 

어느 여 선교사가 힌두교 여신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3:16 말씀이었다. 그때 한 여성이 소리쳤다. “그건 사랑이라 할 수 없어요.” 선교사는 놀라서 “왜요?”하고 물었다. 그 여신도는 대답했다. “저는 자녀를 둔 엄마예요. 저는 우리 애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라 해도, 그 친구를 위해 내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셨다니 그걸 어떻게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위대한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네 그렇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404장 3절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하였다. 얼마나 그 사랑이 놀라왔으면 하늘과 바다에 다 채울 수 없다고 했을까?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제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사도라 할 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끼다가 오늘 본문 3:16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이후 요한은 사랑의 측면에서 주님의 일생을 기록해 간다. 마지막 21장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만나 사명을 주시면서 질문을 던지신다. 요한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던지신 질문의 의미를 절실히 알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중심이 사랑임을 심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사랑하셨던 어머니를 그에게 맡기셨던 주님의 마음을 알고 정성껏 모셨다. 그의 마지막 서신 요한일서는 사랑으로 도배해 놓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방정식으로만 복음을 풀 수 있음을 강조한다.

 

요일 4:9-11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나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얼마나 명쾌하며 얼마나 시원한가!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다. 먼저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다신 분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란 표현과 동일하다. 곧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다. 이 사랑 내가 받았음을 확실히 믿는가?

 

 

두 번째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었다는 거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오늘도 기다리신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죄인이든, 누구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데도 돌아오길 꺼린다. 왜 그럴까? 문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더라는 것이다. 빛이 그냥 싫은 거다. 왜냐? 자기 행위가 악하기에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겁내기 때문이다. 빛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남아공화국 어느 시골마을을 들린 어느 상인이 선반 위에서 광채를 발하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묻는다. “저 돌멩이 누구의 것인가?” “내 아들 녀석이 산에서 주어온 것이지요.” “그래요? 내가 근사한 장난감 하나 줄 테니 저 돌멩이 내게 주지 않겠소?” “음, 그렇게 하시죠. 내 아들도 매우 기뻐하겠군요.” 그 주인이 몇 번이나 상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돌멩이가 엄청나게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생명의 빛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교만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 마음을 꽁꽁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탄의 올무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며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여러분, 어둠은 전염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밤고구마를 누가 보내주셔서 먹다가보니 썩은 게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두었더니 점점 더 썩어 나중에는 다 버려야 했다.

죄악도 늪이라 점점 빠져들기 마련이다. 결단이 필요하다. 그들 스스로는 어렵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우리는 어두움에 머물고 있는 그들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긍휼히 여겨 주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바울은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고 했다. 우리도 이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주의 사랑과 생명의 빛이 비춰짐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라는 거다. 그래서 그 사랑의 빛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나누어야 한다. 그 빛을 받아 은혜가운데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로 죽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십자가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음을 확실히 믿는가? 육신은 땅에 묻힐지라도 함께 일으키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실 것을 믿는가?

 

엡 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심을 믿는가?

 

예수의 흘리신 피로 나의 죄 씻음 받음을 믿는가?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이 나를 감싸심을 믿는가?

그 사랑은 조건적이 아니며 제한적이 아니다. 무슨 죄이든 누구든지 주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한다. 이 귀한 구원의 복음을 오늘도 어둠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나누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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