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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 2016.1.10.
김동진 2017-06-04 추천 0 댓글 0 조회 357
[성경본문] 요한복음4:46-54 개역개정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벼룩은 근육이 발달하여 자신의 몸길이보다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한다.

이 벼룩을 잡아 유리병에 넣고 유리병 중간을 투명유리로 가로막으면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유리에 부딪친다. 반복하다보면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길 멈추어 버린다.나중에 중간 유리장벽을 없애도 벼룩은 예전 유리벽 전에서 멈춘다. 벼룩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유리칸막이 이하로 국한시키지만 사람도 그렇다. 자신이 경험한 것 외는 믿으려하지 않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은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경험의 한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이런 유리병 중간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창조적인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 자녀답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며,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주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사는 거다.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까? 그것은 신앙으로 가능하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권력과 돈이야 얼마든지 있었으니 명의를 청하여 고치도록 했을 것이나 아무 효력도 없어 이젠 매우 위급한 상황이다. 마침 예수님이 유대지방에 계시다가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 듣고 왕의 신하가 급히 예수님을 찾는다.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호수 남서쪽 가나까지는 35여 Km 걸어서 지금 도로로 8시간 이상 걸린다. 이천년 전이었으면 훨씬 더 걸렸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그는 애원한다. “예수님,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야박한 말씀을 한다.“너희가 표적과 기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왕의 신하이면 정중히 맞아 열일 제쳐두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 제자들 중 한사람이 그를 정중하게 모시고 예수님께로 안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님은 냉담한 어조로‘기적과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쉽게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아들을 살려야지!’하는 일념으로 달려온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 기적이나 봐야 믿겠지 무슨 믿음이 있겠어? 하는 핀잔의 어투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다시 간청한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세요.”얼마나 간절했을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밤새워 돌아갔다.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을 만나니 어제 그 시각에 낫게 되었음을 듣는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전부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첫째, 말씀 신앙이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절대 가감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다. 예수님이 따라가서 아들에게‘일어나라’하시면 몰라도 그냥 돌아가라 하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 그 자리에 많은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그의 아들 고치러 갈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믿음이 있느냐? 하며 핀잔을 하는데도 예수님께 매어달리며 주님이라 고백한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왕궁에 살던 사람이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일 거다. 왕만이 자신의 주인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주님!-퀴리오스”라는 고백은 실로 놀랍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삭이 자라갈 때에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었다. “너는 내가 지시하는 한 산에 가서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아들을 불로 태워 바치라고요?”혹 저라면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어떤 질문도,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드릴 준비하여 길을 떠난다. 사흘 길 가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삭과 동행하며 이틀 밤을 지냈을 텐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내가 잘못 들었을까? 이래도 될까? 모리아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나무 위에 올려다 두고 칼을 들어 치려는 아브라함은 정상적인 아버지인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을 높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모델이라 한다. 

 

하루는 순임금이 신하들에게 “구럭에다가 물을 길어 부어라!”명령했다. 그때 신하들이 수군거리며 물을 붓지 않았다. 이유는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물을 부으면 붓는 즉시 다 새어나가고 만다. 그러나 한 신하는 왕의 명령이니 하여 온종일 물을 길어 부었다. 드디어 우물물이 다 없어졌고 바닥이 보였다. 그 신하가 우물 아래를 보니 환한 빛이 났다. 황금덩어리였다. 그것을 올려다가 임금에게 드렸더니 순임금은 기뻐하며 “여봐라. 이것은 순종한 자의 상급이니 그대가 가져가라.”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과연 어떤 말씀이 들려지는가? 고난 중에도 인내하라 하시는가? 잘못된 욕심과 습관을 버리라 하는가? 너는 왜 염려하느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시는가? 세상 명예와 부귀 바라지 말고 십자가만 바라보라고 하는가? 여러분, 주의 말씀을 순종하면 손해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여러분에게 반드시 복이 된다. 신명기 28장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해서 받을 복과 불순종해서 받을 저주를 기록해 두었다. 하늘의 복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에, 짐승과 우양의 새끼에, 광주리와 떡 반죽그릇에,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 창고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 내릴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여 세계만민이 두려워할 정도의 축복을 내리신다. 이와 반대로 불순종했을 때 임하는 저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대로 살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엄청난 축복이 여러분이 것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둘째, 의심치 않는 믿음이다. 돌아가라는 말씀에 그가 일어서긴 했지만 확신에 찬 발걸음이었을까? 아마 숱한 의심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혹 아들이 죽은 게 아닐까?’아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예수께 올 때보다 마음이 더 바빴을 것 같다.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때에 아내 사라와 상의한 것 같지는 않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했는데..어쩌지?”세상 어느 어머니가 그 말에 동의하겠는가? 계모라 해도 끔찍한 일이라 남편을 공박할 것이다.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모리아 산 오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묻는다.“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것을 늘 보아왔던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은“아들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대답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주변 언덕에 양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번제할 양을 준비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까? 아마 그의 속은 다 타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12년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예수께서 돌아보며 말씀하신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마 9:22) 예수께서 두 소경에게는 저희 눈을 만지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신다. (마 9:29) 이때 의심이 일어났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기자는 믿음을 말해(11:1)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여러분, 번제단위에 멀쩡한 아들을 결박하여 놓고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칼을 드는 아버지를 상상해 보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니 아들이라도 드려야 한다는 믿음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불태워 드려야할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면서 깊이 갈등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백세에 선물로 주셨으니, 내가 이 아들을 주님께 드리면 아들을 다시 주시리라는 의심치 않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군우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할 때에 얼마나 방해가 많은지 모른다. 갑자기 의심이 일어난다.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주변 상황을 어렵게 만들며‘너만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유혹한다. 의심치 않는 믿음이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완벽한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불타는 풀무불이 온돌방처럼 달라진 게 아니다. 굶주린 사자가 갑자기 사슴으로 변한 게 아니다. 모든 의심을 물리치며 하나님만 절대의지하며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처방약을 손에 쥐어준 게 아니다. 단지“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을 들은 왕의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면서도‘정말 살았을까?’하는 숱한 의심이 일어날 때마다 ‘아냐, 주님은 고치실 거야!’하는 믿음으로 돌아서는 믿음을 말한다.

 

나이아가라폭포를 동아줄 타고 건넌 사람이 있다. 브론딘이다. 아무리 줄타기명수라 해도 쉽지 않을, 그 폭넓고 위험천만한 폭포 상공을 그것도 밤중에 조명등만 켜 놓고 건넜다. 어떻게 건널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동아줄도 폭포도 관중도 보지 않고 밤하늘의 별 한 개만 응시하고 건넜다고 한다. 바른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 물질이나 명예나 칭찬이나 구하려 두리번거리는 삶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맞추고 똑바로 걸어가는 삶이다. 히12:1-2“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했다.

 

군우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 여러분 마음에 온갖 의심이 일어나는가? 혹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지 못하도록 사탄이 종종 방해하는가? 여러분이 예배하도록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므로 모든 의심의 요소를 물리치기 바란다. 간절히 주의 음성을 들으며 믿음으로 순종하기 바란다.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2016년 계획하심을 알고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대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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