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누가복음22:39-4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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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이 있다. 이 지대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를 못하고,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하지요.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도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 로 만든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영혼 가지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편안한 조건에서 지내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이다.
고난은 새로운 나를 만든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병약해서 모두들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17세, 22세 때 등 세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세 때는 천연두에 걸리더니 20세 때는 늑막염에 걸렸다. 35세 때에는 급성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43세 때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큰 어려움 겪을 때마다 마음에 다짐한 게 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은 나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드디어 43세인 1775년, 미국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12년 후 대통령이 된 남자, 조지 워싱턴이다. 고난을 당할 때는 한없이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그 고난이 지난 후에는 고난을 통해 훈련시킨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고난 시작을 알린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거침없는 비난 속에서 주님의 3년 공생애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기간이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 고난의 순간이 성큼 다가설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삶에서 참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반드시 고난을 거쳐야 한다. 아니 세상만사 고난을 거치지 않고 성취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피나는 노력과 아픔 없이 얻어질 수 있는 성공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고난은 유익하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담대히 선언한다. 119:71“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왜 그럴까? 119:67에 답이 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했다는 것이다. 즉, 불필요한 고난은 없다.
첫째, 성숙된 삶에 고난은 필수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 요셉은 고난의 사람이었다. 욥도 다윗도 모두 고난의 사람이었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은 이렇게 고난 속에서 인생을 꽃피운 사람이었다. 이 세상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인이 아닌 사람 아무도 없다. 완전치 못하며 미숙한 우리는 고난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숙되어 간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과 우리의 자각도 고난을 통하여 완성되어 간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고 말씀하면서 그분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영광을 얻을 때라 하셨다.(12:23)
이제 곧 붙들려 고난당하실 때가 임박한 그날 밤 겟세마네동산에서는 사실상 주님도 고난의 잔을 옮기고 싶었던 것. 그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음을 모르셨을까? 잘 아셨다. 그럼에도 이런 기도를 드리신 이유는? 고난 앞에 주저하고 피하고 싶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 26:36,37에 보면 제자들에게“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실 정도였다. 고난 앞에 두렵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 마음의 결심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백악관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에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가 주인공 비밀요원에게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하는데“나도 무서워!”(I'm scared, too)라 대답한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천황께 신사참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숱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이겨낸 주기철 목사에게 일본경찰은 7년 동안 13번이나 풀려났다. 혐의가 풀려서가 아니라 가족에게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 병든 아내 배곯는 자녀들을 보고 그의 신념이 무너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엄청난 고문 속에서 옥고를 치르고 잠시 나올 때마다 부인은“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마세요!”하며 남편에게 용기를 더했고 그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을 제외한 열 한 사도는 모두 순교를 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톱으로 잘려 죽으신 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분, 피부 벗김을 당하신 분도 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도 화형, 참형, 사자 밥, 십자가형 등등 모든 참혹한 사형 법에 따라 죽임 당한 분들이 무척 많다. 카타콤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성도도 죽음에 주눅 들어 죽음을 회피하려 하신 분은 없었다. 왜냐면 주께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극한 고통을 겟세마네동산에서 갈등하셨음도 알았기 때문에 고난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면 그 고난극복의 힘은 무엇일까. 용기이다. 용기야말로 고난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원동력이다. 용기는 고난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고난과 당당히 맞서 싸우게 한다. 이런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 삶의 용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믿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용기는 삶에 변화를 준다. 고난의 바다를 기쁘고 당당하게 항해하도록 삶에 새 힘을 준다. 혹시 어려움과 고난 중에 있는 분, 있는가? 우리 앞에 놓인 고난들을 두려워말고 더욱 담대하며 용기를 가지며 언제나 고난 뒤에 꽃을 피우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둘째, 고난을 이기려면 영적무장이 꼭 필요하다. 오늘 말씀에 보면(22:43,44) 주께서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더했다고 했을까? 주님이 져야 할 십자가는 온 인류 모든 죄를 대신하는 그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중압감에 눌려 고난을 이기기 위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마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더라고 했다. 기도를 간절히 해보면 정말 중노동이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모습처럼 보였다.
예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피곤하고 바쁠수록 기도하려고 산에 오르셨다. 우리는 어떤가? 일에 몰려 피곤해지면 하던 기도도 중단한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이룬 성과에는 만족함이 없고 허망한 거요.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며 마음속에 교만이 자리한다. 그러나 깊이 있는 기도로 준비하면 어떤 결과에든지 만족하며 당당해지고 두려움이 달아나며 평안해진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세상만사는 전쟁이다. 직장 일이든 가정이든 언뜻 보기에는 사람들과의 전쟁인 듯하다. 부모와 자녀사이 혹은 부부사이에 갈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는 직장 동료들 사이 경쟁구도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상은 내 속 자아와의 싸움이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둠을 주관하는 사탄이 종용하는 거다. 내 속 자아를 부추기는 거요. 결국에 깊이 들어가면 우리 각자가 사탄에게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시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다. 사람의 뜻은 고난을 피하고 싶은 거다. 저 사람보다 내가 앞서고 더 드러나야 하고 내가 더 높은 자리 앉아야 하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만일 섬기는 것이 불편하고 부끄럽다면 내 뜻대로 살며 사탄의 소리를 듣고 사탄의 조종을 당하고 있다는 거다. 참된 승리는 주님 기뻐하시는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영적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오늘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겟세마네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주어진 고난을 기쁨으로 대하고 우리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주님을 더욱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시험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신다. “시험 들지 않게 깨어있어라”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은근히 시험들 일이 많다는 것이다. 괜히 짜증이 나고 분노케 되며, 정말 보기 싫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해도 행복하지 않다. 참 외롭고 피곤하다. 내 자신이 두렵고 무기력해지고 때로는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한다.
왜 그럴까? <내가 주인인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렇지만 주님이 주인인 삶은 전혀 다르다. 깨어있어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면 시험을 이길 힘을 얻는다. 늘 기도하며 주님과 소통하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행복하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기쁨을 누린다. “주님, 어쩌죠?”항상 묻는다. “주님, 무슨 말을 할까요? 주님, 어떻게 대할까요?”수시로 묻는다. 이것이 곧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의 비결이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자 생명이다. 그럼에도 풀려지지 않는 숙제나 마음에 떨쳐지지 않는 큰 고민은 예수님처럼 깊이 있는 간절한 기도, 즉 겟세마네의 자리가 절대 필요하다. 우리에게 겟세마네 없이 그 어떤 문제도 해결이 안 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내게도 주님처럼 겟세마네 기도가 살아있게 하소서!”“나도 주님처럼 간절히 기도드리게 하소서!”기도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영적싸움을 경고한다. 벧전 4:8-10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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