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6:66-7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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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님께서 공적사역을 시작하셔서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병자를 고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눅 12:1에 보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놀라고 또 놀랐다. 오병이어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런 떡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떠올렸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자“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구한다. 하지만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니 유대인들이 수군거린다. “아니, 이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은 다시 반증한다.(6:49-51)“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했더니“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당최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어렵다. 이런 말을 누가 감히 듣겠느냐? 여기저기 수군거린다.(61,65)“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전에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다 하였다.”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내 발로 왔지 하나님이 직접 부르신 기억이 전혀 없어요. 또 예수의 말씀이 너무 어려운 거죠. 그때부터 제자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고 했다.
오늘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떠나는 이유가 다양하다. 목회자가 돈을 좋아하고 설교가 어떻고 장로가 거만하고 아무개구역장이 보기 싫어서 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러나 교회를 떠남은 곧 주님을 떠남이다. 당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왜 그랬을까? 왜 예수님을 떠나야 했을까? 예수님께 얻는 게 더 이상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의 비애가 섞인 질문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떠나가자 열두 제자들도 혹 떠날까 염려되었을까? 아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 험악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죽으실 것을 아셨고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이미 잘 아셨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폭도들에게 붙들리실 때에 다 예수님 버리고 도망할 것조차 아셨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에게“시몬아,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당부하셨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셨을까? 제자들로부터 신앙의 고백을 듣고자 함이다. 이 순간 베드로는 거침없이 대답한다.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분명하다. 얼마나 당당한가! 이 고백 속에 주님을 떠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담겨 있다.
첫째는 주님이라는 고백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을 것이다. 열병으로 고생하던 장모님을 고치시려고 베드로의 집에도 찾아오셨다. 그러나 그가 주님이라고 고백한 곳은 갈릴리바다에서였다. 하루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아침에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사렛 예수란 분이 말씀을 전하신다는 거다. 말씀을 마치신 후 주께서 다가오시더니 그의 배를 빌려 달라 하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 “아니 선생님, 저는 밤새껏 애썼지만 한 마리도 올라오지 않던데요.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물 내려 보겠습니다.”사실 고기가 잡히리라 생각해서 순종한 게 아니었다. 혹 말씀을 듣는 중에 무엇인가 베드로의 마음을 끄는 부분이 있었을지는 모른다. 여하튼 순종하여 그물을 당기는데 예사롭지 않다. 팽팽한 거요. 그물이 막 찢어지려 한다. 급히 다른 배 동료들을 불러 그물을 올리고 보니 두 배에 가득 찼다는 거다. 그는 너무 기뻤죠. 하지만 그 경이로운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든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신가! 그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 “그러냐?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일생일대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여러분도 불현듯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동안 이야기로만 듣던 예수님이 주님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이것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될 때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 주님이신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주님이시다. 이 세상에 주님과 같은 분 없으시기에, 정말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기에, 오늘도 나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기에, 나의 선한 목자 되시기에 예수님은 나의 참 구주이시다!
둘째, 믿고 확신하는 신앙이었다. 베드로는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대답했다. 예수님에게서 그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붙잡았고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였다. ‘바로 이 분이시구나!’우리가 진열장의 물건을 바라보듯, 신앙의 세계를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게 아니다. 내가 직접 그 속에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인간의 좁은 생각으로 선뜻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하나님의 세계를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요구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는 도마였다. 다른 제자들이 기뻐하며 “도마,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어!”아무리 강조해도 도마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절대 믿을 수 없지요. 도마는 사랑하고 존경하던 예수님이 허망하게 돌아가시니 다들 정신이 나가 예수의 환영을 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요 20:25“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다.”이렇게 선포하였지만 8일이 지나 제자들과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신 주님은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직접 만져보라! 하며“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하신다. 도마가 그의 손가락을 넣어보았을까? 아니다. 즉시 도마는 자기의 두 손을 얼른 감추며“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정말 복된 사람이다.”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란 쉽지 않다. 냉철한 지성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신앙의 고백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보지 않고 믿는 자는 정말 복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천년의 역사 속에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믿은 게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부활은 사실이 되었고 지금도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을“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고백하기만 한다면 말씀대로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다.
살인마 김대두는 1975년 경기도 송탄에서 일가족 4명을 죽이고 두 달 동안 전남 경기 그리고 서울에서 17명을 살해한 사람이다. 살인마 김대두가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제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누가 저에게 어느 큰 회사 사장자리 줄 테니 예수님을 버리고 오라 하면 저는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형의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기쁨을 기대하는 지금이 내게는 더욱 행복합니다. 라고요." 이런 고백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난 후 나온 진실한 마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나 같은 것이...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로 변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그를 그렇게 변화되게 했는가? 부모도, 어느 형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많이 배우고 모든 것이 만족할 만큼 충족된다고 해서 이렇게 살인강도가 변화될 수 있을까? 아니다. 지금 돈이면 못하는 일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돈이 사람을 이토록 변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만이 이렇게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실 수 있다. 고후 5:17‘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마치 예수님 십자가 오른편강도와 같은 은혜를 받았다. 그는 평생에 불행하게 살고 못된 짓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으나 예수님 때문에 결국 이런 칭찬 듣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
평생 같이 살아도 자기 아내나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지도 하지도 않았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종종 고백하기 바란다. 이처럼‘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백을 한두 번만 원하실까? 아니다. 주님은 수시로 원하실 텐데 왜 우리는 더디 할까? 학교에서는 “주님, 주님은 나의 온전한 지혜이십니다!”혹 몸이 아플 때는 “주님은 나의 생명, 나의 치료자이십니다!”혹 일터에서는“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목자이십니다!”라고 항상 고백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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