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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묻지 않으신 예수 / 2016.6.12.
김동진 2018-01-07 추천 0 댓글 0 조회 388
[성경본문] 요한복음8:2-11 개역개정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호주의 동물학자 로렌츠박사는 동물의 특성에 대해 연구했다. 동물들은 싸우다가 각기 독특한 모습으로 항복을 표시한다고 한다. 원숭이는 엉덩이를 들고 땅에 바짝 엎드리면 상대방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개는 꼬리를 내리고 목을 보이면 더 이상 싸울 자신이 없다는 표시라 한다. 상대가 항복하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데 이것이 동물의 세계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싸움은 좀 길다. 상대방이 잘못을 시인하고 항복을 해도 때로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상대방의 잘못을 두고두고 되씹거나 거듭 책임을 추궁한다. 좀처럼 용서하지 않는다.

 

한때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텔레반 인질사건에 연루된 은혜샘물교회 아프간 선교팀에 대해 매스컴은 왜 가지 말라고 한 곳을 가서 말썽을 피우느냐? 하며 그때는 교회들마저 마구 욕을 퍼부었는데 그 교회 박은조목사는 아프간에도 국가의 승인을 받아 간 것이며 순전히 매스컴이 오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22개 보도진이 몰려와 교회에다 아예 진을 치고 눈을 부라리고 흠잡을 데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 아닐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긍휼을 잊은 지 오래다. 죄 많은 세상이지만 용서가 없다. 층간소음으로 심각한 다툼은 예사고 심하면 살인으로 이어진다. 순간 내 앞길을 방해했다고 바로 보복운전에 들어간다. 하지만 반대로 배가 고파 빵을 훔쳐 법정에 서게 된 한 소년에게 벌금형이 구형되고 그 사회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재판정에서 벌금을 구형한 판사가 그 벌금을 내 놓은 사건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다. 죄와 상관없는 사람,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는 죄악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 산다. 비록 예수를 믿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죄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남아있다. 나 역시 부끄러운 죄인이다. 믿음 없는 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죄를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죄와의 긴장, 사탄과의 싸움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주님께 고백해야 할 죄가 남아있지는 않은가? 간절히 주의 용서하심을 구해야 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란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한 여자를 끌고 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 여인을 예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세우고 흥분하여 소리친다. “예수 선생,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소. 모세의 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물었다.

 

그들은 당당했다.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어요. 왜냐면 예수는 여러 번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마음대로 재해석하여 혼란스럽게 하고 조상대대로 지켜온 유대교전통을 무시하는 말을 거침없이 했으며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안식일을 범하고도‘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지요,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는 등, 당시로는 정말 상상치도 못할 말들을 하고 다니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단단히 벼르고 온 게 무엇이었을까? 예수란 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니 하며 다니니 간음한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자신의 주장에 어긋나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돌로 치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라 하면 유대교의 율법을 어기게 되니 이번에는 예수의 덜미를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요7:1) 그러니 간음한 여인이 문제가 아니라 살기등등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문제였다.

 

그러면 곤경에 처한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곤란케 하려는 의도로 돌을 들고 선 그들에게 당장 호통을 치시거나 답변을 바로 주지 않으셨다. 말없이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쓰셨을까? 그러자 예수를 고소하려던 그들은 재촉하며 또 질문한다.“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거요? 죽일 거요, 살릴 거요?”예수님은 일어나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땅에 기도문을 쓰셨는지 낙서를 하신 건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명쾌한 답변이었다. ‘돌로 치라’는 답변을 기다렸다는 듯이 돌을 들어 치려다가, 선뜻‘뭐라 했지? 죄 없는 사람이라고?’멈칫한다. 마음에 걸려 ‘나에게 죄가 없는가?’생각해 본다.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 침묵의 순간이 흐르더니 한 두 사람이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여기 한 사람, 저기 한 사람, 자신의 추한 모습을 생각해낸 사람들은 양심상 돌을 들 수가 없다. 슬슬 눈치를 보면서 점점 빠져 나가고 말씀을 들으려 왔던 사람들조차 다 물러갔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을 테다. 그 자리엔 여자와 예수만 남았다. 왜일까? 자신을 돌아본 순간 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남이기 전에 자신 역시 죄인임을 자각한 것이었다. 죄인을 정죄하긴 너무 쉽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때에 예수님은 여자에게 물으신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까?

 

그 여인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 어디에도 아무 기록이 없다. 혹시 예수님의 발에 나드 향유옥합을 깨뜨려 부은 그 여인인지도 모른다. 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아래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분명한 사실은 죽을 목숨 살려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 크며 주님 말씀대로 더 이상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제 2의 인생을 맞이하였다. 당장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신 것을 1년이면 잊어버릴까? 아니다.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았을 것이다. 더구나 죄인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신 그 용서함의 감격은 지울 수 없는 은혜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방에서 돌을 들어 치려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경험이 있는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마음 아파한 적은 있는가? 혹시나 아무도 모르게 행했지만 양심에 걸리는 일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가? 혹 죄의 문제로 가슴 아파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는가? 우리 주님은 죄의 사슬을 푸신다. 롬 8:1-2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셨다. 이를 받아들이려면 용서의 은혜를 얻어야 한다. 나의 죄를 씻기기 원하시는 주님 앞에 나의 죄를 고하며 용서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런 후 용서해주심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도 다 죄의 문제이다.

 

알콜중독으로 인생을 망친 독일 수학교수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윌버 차프만박사의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좌절과 절망과 고독을 안고 뒷자리에 앉았다. 차프만 박사는 시 103:10-14“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멀리 옮겨버리셨다고 말하면서 수학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교수님, 교수님은 수학적인 계산이 빠르시죠? 동이 서에서 얼마나 멉니까?”그 교수는 연필과 노트를 꺼내다가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 교인들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여기에 중심을 두고 여러분 뒤를 서쪽으로 하고 여러분 앞을 동쪽으로 정하면, 세상을 한 바퀴 돌고나서 다시 이 자리로 와도 여전히 서쪽은 여러분 뒤에 있고 동쪽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동쪽이 얼마나 먼지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죄가 그렇게 멀리 옮겨졌습니다.”하나님은 돌아오는 죄인의 죄를 이같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처럼 나에게도 흉악한 죄가 있어 예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지만 오늘도 나를 사랑하사 용서하시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빛 같은 내 죄, 주홍빛 같은 내 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187장)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주홍빛 같은 나의 죄, 흰 눈같이 씻어주신다. 우리의 무수한 죄를 백지로 돌리시는 주님의 용서를 나도 받을 수 있나요? 예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은밀한 죄까지도 다 아시지만 결코 그 죄를 묻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죄인이라도 용서하신다. 그런 이후 우리의 삶을 은혜로 채우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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