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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 2016. 09.04.
김동진 2018-01-20 추천 0 댓글 0 조회 522
[성경본문] 요한복음9:35-41 개역개정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믿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한때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교회 다니다가 실망해서인지, 재미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데 있다. 정말 믿음의 의미를 알고 주의 놀라운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나 믿음생활 그만두거나 주님을 떠나 살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오늘은 소경이 주님의 은혜로 눈을 뜬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피려 한다.

 

첫째, 그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한 번도 세상을 보지 못했던 그가 눈을 떴다면 하루하루가 새로울 것이다. 아마 밤에 잘 때도 눈 뜨고 잤을 것 같다. 혹 눈을 감았다가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아니면 열심히 감았다 뜨며 밤새웠을 것이다. 더 이상 슬픔에 빠지거나 자신을 비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감사할 것뿐이었다. 더 이상 누구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그는 외쳤다.“예수란 분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어요.”너무나 확실한 고백이다. 그를 둘러싼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게 중요하지 않고 예수가 안식일을 범한 사실에 집중해 있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몰아붙이니 한편에서는 고개를 꺄우뚱하며 “아니, 죄인이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하며 분쟁이 일어난다. 소경에게는“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생각하느냐?”묻자 소경은 즉시“선지자이다.”대답한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를 좋게 평가하고 혹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뜬 소경은 그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을 증언했다. 창세 이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하는 이야길 듣지 못하였는데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이런 일을 도저히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예수란 자를 공격할 무언가를 찾고 있는데 도리어 명분을 잃게 되니 눈뜬 소경도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된 거다. 그러다보니 그는 이유 없이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여기서 인자란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이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심을 믿느냐? 는 질문이었고 이에 되묻는다. “누가 그분인가요? 제가 믿고 싶다.”“네가 그를 보았고 지금 너에게 말하고 있다.”“오, 주님, 제가 믿습니다!”그는 앞에 계신 예수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때 그 순간을 여러분은 상상해 볼 수 있는가? 그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시는 분, 그분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말이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한없이 울면서 북받쳐 오르는 그동안의 서러움과 눈을 뜬 감격이 교차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입으며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이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주님을 아는가? 주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신가? 우리 주님은 당신을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깊은 상처라도 싸매시고 고쳐주신다. 여러분은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 감격해 본 경험이 있는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토하며 그 사랑에 감격하여 기도해 본 경험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가치관이 확 달라진다. 삶의 이유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제가 항상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속에 눈뜬 소경의 감동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작은 교회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여러분을 애타게 찾고 계시는지를 꼭 알게 되길 기도한다. 그래서 짧은 한 시간 드려지는 예배지만 부서지고 상한 마음이 치유 받고 믿음의 눈을 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며 그 크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위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되기를 축원한다.

 

 

둘째,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 육신의 눈을 뜨게 된 소경에게 평생 따라다녔던 문제가 죄책감이었다. 태어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했을 것이다. 구걸하면서도 숱한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교에서는 전생의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할 것이나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님을 알게 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 하셨다. 예수님 때문에 죄의 무거운 짐 벗은 감격이 있는 그는 믿음의 눈도 뜨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에게서 죄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39절에“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아니 못 보는 사람 보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인데 굳이 보는 사람 보지 못하게 하신다면 고약한 일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세상에 행하실 심판에 대해 말씀했다. 그것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임을 겸손하게 시인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을 보게 하고, 교만하여 스스로 본다고 자랑하는 자는 영원한 어둠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39) 사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뚜렷이 분리되었다. 맹인이었던 자는 눈을 떠 구주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눈이 밝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구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죽이려 한다. 이게 바로 심판의 이유이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발끈하며“그러면 우리도 소경이란 말이요?”한다. 이때 주님은 대답한다. 41절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하셨다. 이 말씀은 두 눈을 가진 죄이다. 두 눈 뜨고 있음이 죄라는 거죠.

 

나도 맹인인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 자기가 마치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가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아는 사람은 나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인간의 무지를 절감한다. 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학자는 마치 자기가 과학을 다 아는 것으로 여긴다. 미련하다. 우리가 보는 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아는 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경험한 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배운 게 얼마나 될까? 그런 교만은 참으로 미련하며 어리석은 일이다.

 

진정 지혜로운 인생은 자신을 아는 인생이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 나는 무지한 인생이라는 것, 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 나는 단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잠 9:10절에서“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 잠3:7절에서는“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 이 세상이 너무 잘 보이면 하나님 세상이 잘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 칼럼니스트가 유명한 석학에게 질문한다. “현대인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십시오.”석학은 이렇게 대답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또 더 모르게 되어가고 있다.”그렇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인정한다.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와 우주를 다 품은 듯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곧 정신세계와 영적 세계이다. 우리 주님께서 본다,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영적 세계를 말하심이다. 우리 인생은 잘 살아봐야 백년이다. 결코 영원하지가 않다. 과학자 미가엘 패러디의 말년에 한 사람이 물었다.“선생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리라고 추측하십니까?”그러자 패러디가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추측하지 않고 확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다. 나도 예수님의 공로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기독교인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듯이 확실한 믿음 안에서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어야 영원에 이른다. 왜냐하면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에 이른다.’고 하셨다. 그래서 누구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죄의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그러니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를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는 거죠. 그러나 예수 믿으면 먼저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한다. 롬 7:22,23에서‘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다.

 

물론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다보니 계속 죄로 더러워지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홍같이 붉은 죄이지만 흰 눈같이 희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가 육신의 눈 뜨고 믿음의 눈을 떠서 구원의 주님을 만났다. 그의 삶은 바리새인에게 경고한 말씀, 내가 무엇을 볼 수 있다고 하면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며 살았을 것이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언제나 최고의 가치를 두며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두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귀하고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기 바란다. 그래서 무엇보다 믿음의 눈을 뜬, 복된 인생이 다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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