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1:20-2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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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한 주 전 금요일에 한 여사관의 부친상에 조문을 다녀왔다. 90세의 장로님이라 크게 위로하지 않아도 되었다. 근데 그 여사관의 모친께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또 문상했더니 온 가족이 슬퍼하고 있었다. 두 분을 연이어 보내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모친의 엄청난 기도와 믿음으로 핍박이 심했던 남편이 예수 믿고 확실히 변화되어 장로님이 되셨고 자녀 모두가 믿음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그 기도의 몫을 이어갈 것인가? 하는 염려였다. 훌륭한 믿음의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슬픔이었다.
죽을병이 들었다는 것은 가족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된다. 오라버니 나사로를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으나 달려오시지 않았고 나사로는 죽고 말았다. 나흘이 지난 후 문상을 오신 예수님과 일행을 마르다는 곧 나가 맞이하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다. 부모처럼 의지하던 오빠가 병으로 죽게 되자 두 자매가 살아갈 길은 막막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도 마리아도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곧 즉시 오시지 않음에 대해 섭섭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지만 마르다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고백한다. 예수님은“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예 그럼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압니다.” 마르다가 말한 부활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유대 교리를 말하는 것뿐이었으나 예수님은 실제 부활의 사실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25절에서 예수님께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되물으신다. 이제야 마르다는 “주님, 그렇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다.”라고 믿음을 고백한다.
언니가 동생에게 주님 오신 사실을 알리자 마리아도 급히 나와 맞이하지만 속상한 건 마찬가지다. “왜 이제 오셨어요?” 이 사건에서 두 가지를 발견한다.
첫째, 예수님은 슬픔당한 자를 위로하시는 분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이전만 해도 상주들은 문상객을 맞이하며 곡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슬피 울자 뒤따라 나온 유대인들도 따라서 곡한다. “아이고, 아이고!” 예수님은 몹시 안타까워하시고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물으며 함께 눈물 흘리셨다.
왜 우셨을까? 두 자매 때문에? 자신이 다시 살릴 것을 아셨는데 우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 슬픔을 아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쓰라린 고통도 고민도 다 아신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시다.
어느 목사 어린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그가 이전에는 흔들릴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믿음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목사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어려운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성심껏 섬겨왔었고 그들의 자녀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데려가시는가? 좀체 이해되지 않았으며 목사의 슬픔은 그를 비틀거리게 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묻곤 했다. 어느 날 나이 지긋한 목사님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보게, 하나님도 역시 그 일로 인해 울고 계신다네.”이 대답은 슬픔에 싸인 목사의 마음속 깊은 곳에 공감을 주었다. 그 목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상하게 하는 만큼 하나님도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신 이유이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나 슬픔을 당한 여인들의 마음도 깊이 읽으셨다. 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주께서 바로 나의 곁에 계시며, 어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온전히 의지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둘째, 마르다에게 확실한 부활을 선포하신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에게 주님은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셨다. 그런데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에 마르다에게 부활에 대한 기대가 위로가 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마르다는“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응답했다. 막연한 거다. 교리로 배워온 거다. 그러나 주님은 마르다에게 확실한 신앙을 심어 주신다. “마지막 날이 아냐. 막연한 게 아냐. 단순히 교리가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하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마르다는 신앙의 모습을 다시 회복한다. “주님, 그렇군요.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생명을 얻는 믿음, 즉 이 부활에 있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근본목적도 예수 믿고 영생을 얻게 함이라고 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도 영생을 얻음에 있다. 확실히 그런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하자 마르다는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대답한다. 이때 주님께서는 “내 말이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하시며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요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기도하신 후에“나사로야 나오라!”부르신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온다. 요11:45에 마리아에게 문상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46에,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이 부활사건을 그대로 전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가운데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엄청난 영향력이 싫어서 예수를 죽이려고 모략을 짠다는 거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죠.
스탠포드가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다. 스탠포드는 부자였고 캘리포니아출신 상원의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다.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다.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데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그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다!' 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청년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다.
여러분, 죽은 자의 부활을 설명하기도 믿기도 쉽지 않다. 터미네이터 같은 공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이천년 전 예루살렘 남동쪽 작은 마을 베다니에서 일어난 기적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죽은 자의 부활사건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느냐? 하며 부활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 쉬워요. 아니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혹 폐암이나 간암 말기 중병에서, 희귀 질병에서 기도 받아 치유되는 일들은 회복된 것을 보여주면 믿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려? 절대 믿지 못하지요. 어림도 없어요. 그렇다면 믿음 없이 열심히 살다가 죽었다면 어떻게 되나요? 한 줌의 재가 되든지 땅에 묻혀 영영 썩어버리겠지요. 끝! 수십억 인류가 왔다가 가는 거요. 그 이상은 없어요. 그러면 왜 사는가요? 60년, 70년 후에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내가 기억하고 애쓰고 수고한들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만일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면 이 세상자랑도 영광도 수고도 업적도 얼마나 헛된가!
그러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을 몸소 보여 주셨다. 십자가에 죽어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달려가지 않고 이틀 지체하다가 찾아가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예수 믿는 자들이라면 치를 떨며 잡아들여 죽이려 했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늘의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강렬한 빛에 눈멀고 다메섹에 들어가 제자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눈을 뜨고 새 인생을 살게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선봉장이 되어 가는 곳마다 온갖 어려움, 낭패, 고난 다 이기고 복음을 전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전하는데 고전 15장은 그가 경험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고전15:16-19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여러분, 이 세상 삶이 전부인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가요? 절대 그렇지 않다.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폭탄적인 선언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너무 많고 남을 위해 목숨 버리는 사람도 제법 많다. 다음 세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니 정상으로 살지만 죽음저편의 세계를 모르면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어떤 이유로 나왔던 간에 죽은 이후 저 천국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여러분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그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시요 부활의 첫 열매이셨던 것을 확신하며 우리도 다시 사는 부활의 순간이 올 것을 믿는다. 빌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요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우리는 언젠가는 다 죽는다. 피할 수 없다. 이 몸은 썩고 완전 사라지는 거요. 그러나 썩을 몸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산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고 이 약속 위해 예수님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믿는 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부활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복되게 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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