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2:44-5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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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있었다. 평생 고치지 못해 늘 달고 다니던 온갖 병든 사람이 벌떡벌떡 일어나고 고침 받으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들이 달아나는 일이며,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베 동인 채로 걸어 나오게 하는 기적은 문상 온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 놓는 능력이었음이 분명하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초자연 신비의 능력이었다. 그런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게 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왜 마음을 닫고 거부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눈에 쌍불을 켜고 예수에게서 흠집을 찾으려 했다. 그것도 유대율법에 정통한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러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참지 못했다. 예수님의 인기를 시기했다. 정말 유치하고 끈질긴 모습을 본다. 아마도 그들에게 예수님이 크나큰 벽이 되었던 이유는 이미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종교적인 지위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들의 강한 불신을 사도요한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이해하려 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하였다. 그리고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닫아버리신 것이 아니냐고 불신의 책임을 오히려 하나님께 전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이미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미 닫힌 세상이요, 굳은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불신의 세력이 강하고 깊은지 모른다. 오늘날도 그렇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실 이유가 있을까?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고 무디게 하실 이유가 있을까? 그러실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모세의 기적 앞에서 손을 든 바로였지만 또 번복하고 또 번복하여 완고하여졌다고 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보내려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못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다. 주님께서도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다(12:47)고 하셨다. 어둠의 세상은 사람들이 잘못되어 스스로 악한 길로 가며 돈과 권세, 명예에 집착하며 세상 부귀영화와 쾌락을 더 즐기니 거룩한 하늘의 것을 알고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런 사람들을 보니 마치 하나님이 제쳐놓은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거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 첫째는 우리의 눈이 멀거나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 주님과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영생에 이르는 순수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연암 박지원이 쓴 글 가운데 20년 만에 눈을 뜬 한 소경의 이야기다. 너무나 극적으로 눈을 뜬 소경은 너무나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막상 집을 찾아가려고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더라는 얘기다. 20년을 다녔던 길인데 마치 처음 와 본 곳인 마냥 생소하고 낯설게만 여겨졌다. 집 모양도 대문도 골목도 거의 비슷비슷하여 분간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 어쩔 줄 몰라 서성대다가 결국에 그는 주저앉아 흐느끼고 말았다.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화담 선생이 그 까닭을 묻고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다시 눈을 감으시오.”그래서 눈뜬 소경이 눈을 감자 이전 그 느낌들이 되살아나 무사히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육체의 눈이 열리는 순간 마음의 눈이 닫힌 것이라고 할까. 사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대부분 육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산다. 눈을 뜨고 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에 의지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당연히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영의 눈을 뜨려는 마음의 간절한 바램이 없이는 영적 신앙의 세계에 들어서질 못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지만 마음의 눈이 가려져 잠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를 알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주님께서 식탁에서 축복기도 해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인줄 알아보았던 것을 아는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멀거나 우리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러분의 영적 눈을 떠서 주님과 주님의 세계를 보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둘째, 그러자면 믿음의 실세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준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은 눈앞에 늘 계신 예수님을 보고 따랐으며 생명의 주님으로 믿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일이고 주님을 보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해석은 우리에게는 난이 하지만 참 진리다. 즉, 보이는 것 배후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보는 것이 믿음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뜻을 아는 것이 믿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비선실세란 말이 근간의 화두가 되고 있다. 비선실세는 박근혜대통령의 비밀리의 측근으로 실세를 행세하는 최순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탄핵의 길로 가고 있다. 물론 박근혜대통령이 어려웠던 시기 붙잡았던 최태민의 줄이었기에 그 줄만 잡고 그 말만 믿고 그 말에 의존하고 살아온 것이 화근이 되었다. 최태민은 극도의 실의에 빠져있던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죽은 어머니가 현몽하여 말씀하셨다고 하며 근혜를 현혹하여 헛된 망상에 빠지게 하고 최태민 자신의 말만 듣도록 하였다. 이후 모든 결정을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항상 의견을 묻고 그대로 따라다녔으니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 줄을 놓지 못했고 고 최태민의 영험을 이어받은 최순실에게 중요한 문건에 대해 의견을 들어야 했으며 세월호와 같은 위기대처가 불가능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굳이 비선실세를 말하는 이유가 무얼까? 오늘 본문도 예수님과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보이는 현실이나 드러낸 증거가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충분히 이해된다는 말씀을 하신다. 곧, 12:44,45“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심지어 12:49,50에는“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은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마을 천한 목수의 아들로 인식되기 때문에 무시당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생각해 보자. 우주만물을 만드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방법이 어떤 초자연적인 형태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지만 이러한 일조차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오심은 인류역사상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그의 모든 언행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님 비선실세는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영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에 자아가 강하고 내가 스스로 정하고 행하는 일들이 많은데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실패하기 쉽고 후회가 많다. 왜일까? 아무리 인생을 많이 살았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며 충동적이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박근혜의 비선 최순실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인도하심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이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주의 선한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이며,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기 전 내가 말을 내뱉거나 행동하기 전에 ‘이럴 때 주님이시면 어떻게 하실까?’ 를 먼저 묻는 기도와 묵상의 습관이 늘 있어야 한다.
믿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양궁은 세계정상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무서운 훈련을 거친다. 이 훈련 가운데 표적에 집중하는 훈련이 있다고 한다. 정신을 가다듬어 표적에 집중하여 조그만 표적이 크게 보일 때 적중률이 높아진다. 우리에게도 분명한 삶의 목표에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면 그 삶이 활기를 띤다. 그것을 비전이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힘들지 않으며 아름답고 생동한다. 우리 마음이 열리면 우리 삶도 세상도 달라 보인다. 고난과 역경을 인내하는 힘,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믿음의 눈으로 보자.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섬기기를 바라신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다. 당장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 후 정금 같이 사용하실 것이다. 참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믿는 우리를 환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더 이상 어둠에 갇혀 살지 않게 하실 것이다. 우리 모두 영적인 눈을 떠 하나님의 세계를 밝히 보며 믿음 가운데 영생 가운데 축복 가운데 살아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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