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3: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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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공: 대한성서공회
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다.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으나 아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보냈다. 하루는 아들이 엄마한테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엄마 저 고민이 있어요. 다름 아니라 제가 너무 사랑하는 친구 이야긴데요. 그 친구가 유학 왔다가 그만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마약중독에 빠졌어요. 마약 한 채로 운전하다가 큰 사고가 난 모양이에요. 죽지는 않았는데 몸이 다 부서져 회복된다 해도 평생 하반신마비로 살아가게 된대요.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친구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 엄마는 남의 자식 이야기지만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냥 마음에 있는 대로 대답했다. “아이고 어떡하니, 글쎄, 뭐 안쓰럽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서 뭐하니?”며칠 뒤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급히 오라고 해서 가 보니 아들이 자살을 했다. 아들이 했던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어쩌다 마약중독에 빠졌고 사고를 냈으며 병원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남의 얘기인 것처럼 가장해서 엄마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엄마의 말을 마지막 선고로 받고 그의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에스겔 16장에 있다. 누가 사생아를 버렸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서 피도 닦지 못하고 탯줄도 끊지 못한 채 갖다버린 것이다. 그런데 피투성인 채 발짓하던 아이를 한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하면서 그를 데려다가 씻기고 잘 양육했다. 자기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알몸을 가리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자기 모습에 스스로 교만해져서 가진 자들과 함께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다가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으로 다시 모든 이에게 버림받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 다 끝장난 모습을 이런 사생아의 생애에 비추어 말씀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사랑의 고백을 하신다.
“원래 피투성인 채 발짓하던 너, 쓰레기통에 버려진 채로 발짓하던 불쌍한 너를 내가 보고 약속했다. 내가 한 약속을 기억하고 내가 다시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피투성이라도 죽지 마라.”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해준다. 도대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해서도 안 될 죄인이요 반역자이던 우리를 위대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끈질기고 지독한 사랑, 피보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겔 16:62,63“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말할까? 그분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떤 때에 느끼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라고 말한다. 그래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도 분명한 체험 없이는 잘 알 수 없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숱한 가르침은 분명 들었지만 그분이 말씀하는 참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예수님이 붙잡히는 위기에 처할 때, 함께 목숨이라도 버리겠다했던 제자들이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음을 우린 안다. 제자들도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왜 십자가 지셔야했는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을 아시면서 이로 인해 처절한 마음이 짓누르는 그런 때에도 여전히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다 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사도 요한이 어떻게 알았을까?
브라질 산호세 한 도시근처 교도소가 있었다. 1984년 브라질정부는 그 교도소의 운영을 두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맡겼다. 휴마이타라 개명된 교도소에는 오직 두 명의 전임직원을 제외하면 모든 업무가 수감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척 콜슨이 교도소를 방문한 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나는 휴마이타를 방문하였을 때 모든 수감자들이 웃고있는 것을 보았다. 나를 안으로 들여보낸 사람은 살인죄로 잡혀온 사람이었다. 내가 어느 곳을 가든 사람들은 평온해 보였다. 안내자는 예전에 죄수들을 고문하던 작은 독방으로 안내하였다. 지금은 단 한사람만 갇혀있다고 했다. 그리고서 독방의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십자가만 있었다. 단 한사람 죄수인, 예수 그분은 그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남은 형기를 채우고 계십니다.”그 안내자의 말이었다.”
죄의 형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 이것을 말씀그대로 믿게 된 죄수들은 더 이상 죄의 굴레 쓰지 않아도 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나의 죄과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계심을 아는가! 그 십자가의 사랑을 오늘도 나도 믿는가?
“나 믿노라 나 믿노라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211장)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단순히 종교적인 스승인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아들인가? 핵폭탄 같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인가? 무엇보다 모든 환경과 주변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마술사인가? 그러나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온전히 희생하신, 그 무엇에도 견줄 수없는 사랑의 완성 자였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프러포즈하셨는데 너무나 확실하게 하셨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 거다. 그분이 죄로 가득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셨는지“세상에 있는 자기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했다. 끝까지라 함은 비록 제자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잘못 행하는 것까지 용납하는 사랑이다. 어떤 환경이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불변의 사랑이요 그 높이를 다 알 수 없고 그 넓이와 깊이를 무엇으로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정말 끈질긴 사랑이다. 바닷물을 양동이로 다 퍼낼 수 없듯이 우리의 사랑을 양동이라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망망한 바다와 같다. 이런 사랑을 알고 이런 사랑으로 나의 삶을 덮어버리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다. 노래 가사처럼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 제자였지만 주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 사랑 느끼지 못하던 유다에게 마귀가 틈을 탄다.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마귀가 마귀 생각을 유다에게 계속 불어넣는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긴다.‘너 예수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어! 차라리 예수를 팔면 어때?’한다. 우리에게서 예수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옅어질 때 마귀는 속삭인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십자가, 섬김, 희생을 꺼려할 때 마귀는 우리를 마구 혼돈에 빠트린다.‘너 그 정도만 해도 돼! 다들 안 해!’그러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이런 마귀의 계략을 물리칠 성령을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 뜻을 알게 하며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 분이 바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주님과의 영적인교제가 가능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현장에서 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 성령께서 오늘도 믿는 자의 마음속에 역사하며 놀라운 축복과 기쁨, 사랑을 체험하게 하신다.
예수회(Jesuits)는 가톨릭교회 개혁운동으로 이냐시오 데 레올라와 신앙동지 6명이 시작한 단체이다. 이 예수회에 가입하려면 다음의 맹세를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나 시체처럼 운반될 것이며 맹인의 지팡이처럼 사용될 것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에 대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이다. 시체처럼 말없이 주님 뜻대로 살겠으며 맹인의 지팡이처럼 사람들을 바르게 하고 선하게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겠다는 약속이다. 끝까지 주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신다. 늘 사랑하고 계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들이다. 이런 하나님 사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 향한 그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바울은 예수 향한 자기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다. 롬8:35~39“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버클리 목사님 아들이 아버지께 물었다. “성경을 읽다가 그룹과 스랍이란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에요?”“그룹은 지식이란 뜻이고 스랍은 불이란 뜻인데 그룹은 특별히 지식이 뛰어난 천사이고 스랍은 불처럼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천사란다.”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버지! 저는 지식이 많은 천사보다 호수라도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의 천사가 좋아요.”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을 이기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생명을 걸고 우리를 지켜주신다. 왜 그러실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다. 한 눈 팔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 막아서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성하게 된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사랑의 일군이 다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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