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4:1-6 개역개정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프랑스곤충학자 파브르는 날벌레의 생태를 관찰하던 중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많은 날벌레들이 앞에 있는 다른 벌레가 돌기 시작하면 방향도 이유도 없이 앞에서 날고 있는 놈을 따라 무턱대고 그냥 빙빙 돈다는 것이다. 이 빙빙 돌고 있는 날벌레들은 눈앞에 먹을 것을 줘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돌기만 하는데 무려 7일 동안 돌다가 결국 굶어죽고 말더라는 거다. 날벌레만 그렇다면 괜찮다. 한 통계자료는 날벌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전체인류 87%에 이른다고 한다. 좀체 믿어지지 않는 수치이다. 오늘도 하루해가 밝았으니까, 그저 살아있으니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한강을 따라 줄지어 출퇴근하는 숱한 차량들을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무엇일까?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한정한다. 사실상 죽음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르다. 인생이 무엇인지 답을 준다. 저희는 가끔 이런 이야길 주고받는다. ‘우리가 언제까지 살면 좋을까? 은퇴하고 10년이면 되겠지? 언제 그 나라 가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 아무리 커봐야 국무총리나 대통령 한번하면 다 아닌가! 아무리 잘 살아도 하루 3끼는 같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세면 가야 한다. 왔다가가는 인생이다. 내 마음대로 더 머물 수도 없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 가야하는 거죠. 한 줌의 재로 남을 인생이라면 굳이 더 살아서 무슨 낙이 있고 자기분야 1인자가 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는 날벌레보다 나은 게 있나요? 가령 고층빌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올라가고 있다. 120층이긴 하지만 몇 층이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면 더 이상 발을 뗄 수 없는 낭떠러지라고 한다면 마냥 올라가기만 하겠는가? 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말이다. 왔다가가는 인생이 분명해요. 여기서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오늘 말씀에 이 인생의 문제를 다루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제자들이 무엇을 그리 염려했는지 밝히진 않았으나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 왜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도 당장 주어진 현실이 버거울 때가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마음에 근심한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해요. 자신을 학대하며 술을 의지하며 마약이나 도박에 빠져들기도 한다. 때로는 방황하며 신앙도 멀리하고 주님의 말씀은 아예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딴소리도 한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아냐! 너희는 따라오지 못한다.” 고 하시니 베드로는 “주님,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하여 라면 내 목숨도 버리겠습니다.” 말한다. 대단한 충성심이죠. 하지만 이런 정황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 집>을 거론하셨고 주님이 갑자기 떠나시는 것도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러 간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요 14:2,3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얼마나 엄청난 계획이며 축복인가!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생각은 평행선을 긋는다. 주님이 계획하신 길을 떠나가심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요.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두 가지다.
첫째, 마음에 평안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신 후 14:27“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거듭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잘 안다. 이 세상은 온통 미움과 다툼, 질병과 고통, 죄악과 전쟁, 기근과 재앙, 불안과 염려,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런 까닭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만 현실 앞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평안이 없고 세상걱정에 여전히 휩쓸리기가 쉽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걷고 싶었고 예수님은 걸어오라고 손짓한다. 그도 용기 내어 바다 위를 걷는다. 시퍼런 바다 속을 보니 두렵기만 하다. 순간 물에 빠지고 만다. 그의 믿음이 담대함을 잃었다. “주님, 살려주세요!” 소리친다.
세상일로 불안해하며 염려하면 믿음이 생기지가 않는다. 마음에 근심이 차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염려와 근심, 불안과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담대해질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을 절대 신뢰함이 필요하다. 그런즉 마귀가 우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한 상점을 경영하는 유태인이 중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어 온 가족이 머리맡에 둘러앉았다. “여보, 어디 있소?” “흑흑, 여기 있어요.” “첫째는?” “네, 저도 여기 있습니다.” “둘째야!” “네 아버지, 저도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예, 저는 막내입니다.” 상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가게는 누가 지킨단 말이냐?” 그 상인은 죽기까지 염려를 지고 있다. 이렇게 어리석은 게 인간이다. 혹 여러분은 온갖 염려 꽉 붙들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면서 어떻게 염려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약속하셨다. 우리가 무거운 짐 진 것 아는데 일단 주님께로 오라 하셨으니 가야 한다. 분명 등에 진 짐 벗어야 쉼을 얻는데 내가 벗기기는 어렵다. 안 된다. 그러나 주님을 꼭 붙들면 무거운 짐 떨쳐버릴 수 있어요.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적어도 주께로 가까이 나아가야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 주시는 참 평안을 맛볼 수 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이다. 지난 2002년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열광했던 월드컵축구의 열광적인 응원보다 하나님은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천군천사를 동원하며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안타깝게 간구하시며 우리가 잘못된 길, 곁길 가지 않도록 막으신다. 연약한 우리에게 사탄의 계략을 물리칠 힘을 부어주신다. 친히 우리 방패막이가 되어주신다. 혹 너무 지쳐 기진맥진하는가? 주님께서 여러분의 손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자. 앞이 캄캄하고 마음에 낙심 되거든 여러분의 참 목자이신 주님께 기도하기 바란다. 아브라함 위해 이삭을 준비하시는 여호와이레의 사건은 반복된다. 혹 마음에 동요가 심하고 불안한가? 거센 풍랑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호와 샬롬, 평안을 외쳐 보자. 혹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상하여 있는가? 치료하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를 찾기 바란다. 실패와 좌절을 맛보는가?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힘차게 들기 바란다. 그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시다.
둘째, 우리 위한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신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자 위해 처소를 준비하고 다시 와서 그곳으로 인도하시겠다! 약속하셨다. 영원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이보다 더 중요한 진리는 없다. 만물이 있다가 결국 사라진다면 이 거대한 우주의 존재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대로 존재할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 우린 3차원세계에서 산다. 4차원은 시공간을 초월한 순간이동을 말한다. 혹 5차원이 있다면 죽음을 넘어선 세계 그 영적부활을 조금이라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목사가 초 신자 대학생에게 세례문답 한다. “예수님이 형제의 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나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도?” 대학생이 너무 쉽게 대답하기에 성경을 얼마나 아는지 질문한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인사?” 대학생체면에 모른다고 하긴 부끄러워 “‘너 겁나게 놀랐재!’라고 했습니다.” 정답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비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몸으로 체험한 제자들은 큰 확신에 차서 더 이상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온갖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굳세게 믿음을 지켰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죽음저편의 세계를 알고 영생의 소망을 확신하고 나서였다. 주님께서 영생에 이르는 길 되시고 진리시며 생명 되심을 확신한 이후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르는 진리일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여럿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행 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죽음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히 10:19,20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인간의 선행과 수행으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다. 새롭고 산 길은 예수의 피를 힘입는 믿음의 길을 말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그 십자가희생으로 열려진 영원한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간다. 할렐루야!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바울은 그의 생애를 온전히 주의 복음 위해 드리면서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강한 부활신앙을 볼 수 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으니’ 하며 고전15:17,19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했다. 이 세상의 삶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한가?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그날에 다시 살 것을 확실히 믿는가? 이 믿음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나는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까지이다. 나의 영원한 길이며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이름 높이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한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