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창세기3:1-1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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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아들, 딸 아이가 크니까 서로 마음 상하거나 부딪힐 일이 점점 줄어드네요. 관계가 점점 좋아져서 마음 상하거나 부딪힐 일이 없어야 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한 번도 얼굴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서로 바빠져서 안 부딪혀서- 아니죠, 못 부딪혀서 -마음 상할 일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부딪히는 일이 생기는데, 아이들 책상 위에 오만 가지 것들이 다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제가 꼭 잔소리를 합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공부하는 책 말고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다른 것이 보이면 괜시리 눈길이라도 한 번 주게 되어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아이들 책상위에 컴퓨터도 필요없을 때는 안보이게 치우라고 노트북으로 바꾸어 주었거든요. 하지만 아이들이 제 맘같이 안 됩니다.
저희 아이들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습니다만, 우리네 인생은 눈앞에 무엇을 보고 있느냐?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삶의 기준이나 방법을 달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무엇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계십니까? 그것들이 여러분의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오늘은 이 주제를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노아 할아버지의 10대손입니다. 데라의 아들로 우르 땅에서 태어납니다. 관습을 좇아서 이복누이인 사래와 결혼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아이들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동생 하란이 조카 롯만을 남겨두고 죽습니다. 상황이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 데라가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사를 하여 생활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205세에 죽습니다. (창11:26-32)
그 후,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게 복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해줄 테니, 대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씀을 듣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만나고 계신 하나님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으면 복을 주실 수 없는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인가요? 아니죠?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큰 복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푸른초장영문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조건을 내건 축복을 약속하셨겠습니까? 그 조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고향의 익숙함에, 친척들의 도움에, 아버지집의 윤택함에 한 눈 팔지 말고, 나만 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어쨌든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라도 하시는 가나안으로 떠납니다. 그런 것들에 한 눈 팔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결단을 한 겁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이 훨씬 값진 것이기에 과감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가나안에서의 타향살이기 쉬웠겠습니까? 여러분도 날마다 그 힘든 타향살이를 하고 계시니 아브라함의 삶이 얼마나 고됐을지는 상상이 가시지 않습니까? 세상과 조금이라도 타협하여 조금 편하게 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는 나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이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갑니다. 부인 사라가 굉장히 예뻤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 사람들이 부인 사라를 탐내어 자기를 해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합니다. 그리고는 “당신 본래 나의 이복누나이니 그냥 누나라고만 하고 우리가 부부라는 이야기를 하지 맙시다. 뭐 그게 거짓말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내가 당신 덕분에 목숨도 부지할 수 있고, 대접도 잘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좋지 않겠소?”라는 겁니다.
그럴듯하지요?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사회에선 여성의 지위가 낮았습니다. 인권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서 말씀하고 계신 이웃집 소유 중에 여성이 포함될 정도의 사회입니다. 그러니 사라 하나가 희생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과 재산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면 요즈음 말로 “가성비”가 매우 높은 거래입니다.
또 실제로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계산대로 되는 듯했습니다. 이집트 왕이 사라에게 반하여 아브라함에게 양떼, 소떼, 암수나귀, 남녀종과 낙타까지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집트 왕을 통해 아브라함을 질책하십니다.(창 12:17-20) 결론은 역시 하나님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타향살이가 참으로 녹녹치가 않습니다. 녹녹치않은 타향살이가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의 타향살이 한번으로 끝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 세상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맞이하게 될 내세에서는 하나님 나라, 고향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태어나실 때 울고 오셨던 타향살이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 고향으로 떠나 때에는 편안히 웃으시며 떠나시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어려운 타향살이 중인 아브라함에게로 돌아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라함이 부자(富者)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평안해졌을까요? 타향살이의 낯설음과 어려움이 고향에서의 익숙함과 평안함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하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13:2에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라는 말씀이 있고 또 13:6에는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소유가 풍부하다.”라는 말과 “소유의 많다.”는 말은 같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뜻이 다릅니다. 본문에서 “소유가 풍부하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소유가 많다”라는 뜻보다는 “너무 무거웠다”라는 뜻입니다. “너무 무거웠다”라는 말은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양이 무거웠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가 모은 재산이 많은 만큼 사용하는 재산의 양도 많은 무거운 책임을 지닌 청지기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부자였습니다.
반면 “소유가 많다.”를 나타내는 히브리말은 “가진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산이란 책임이 아니라 차지하는 것,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산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은 부(富)를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의 타향살이에 부자가 되는 것이 반드시 행복해지고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리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어쨌든 부(富)에 대한 인식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책임을 느끼고 있고, 세상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롯에게는 차지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라는 차이를 확실히 해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5-7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아브라함과 롯 각자의 소유가 많아져서 가축을 유목할 땅도, 물을 마시게 할 우물도 부족해지자 목자들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서로 좋은 것, 많이 먹이려다 보니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건의 해결 방식에서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롯에게 아브라함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자기를 자식처럼 보살펴준 큰아버지입니다. 자기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된 것도 아브라함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먼저 와서 사과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대책을 물어야 마땅한 것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내용은 없고 아브라함이 먼저 롯에게 제안합니다.
8-9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친척이다. 나와 너, 그리고 내 목자와 네 목자끼리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않느냐? 자, 서로 갈라서자. 네가 원하는 땅을 택하라. 네가 동쪽으로 가면 나는 서쪽으로 가고 네가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가겠다.”
아브라함에 제안에 롯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결정합니다. 창 3:10-11 말씀입니다.
“롯이 요단강 유역을 바라보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다. 이때는 아직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땅이 마치 에덴 동산 같고 이집트의 비옥한 땅과 같았다. 그래서 롯이 요단강 유역을 택하고 동쪽으로 옮기자 그들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유목을 하기에는 요단강 유역이 유리합니다. 먹일 풀도 많고, 마실 물도 많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물어도 아브라함이 먼저 요단강 유역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설사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거나, 심지어 요단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라고 권유한다고 해도 롯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롯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요단강 유역을 선택합니다.
지금 롯이 은혜로 모르고 무례한 욕심을 부리고 있나요? 아닐 겁니다. 롯도 도리도 알고 은혜로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롯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롯 사장님만 바라보고 있는 목자들과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또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산골 보다는 도시가 유리할 겁니다. 시장도 가깝구요. 무엇보다 가축도 있었구요. 거기에 가축에게 먹일 풀과 물이 풍부했습니다. 또 세상의 즐거움 필요합이다. 그렇게 때문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도리에 어긋난줄 알면서도 그렇게 서낵을 합니다. 유단강 유역을 선택해야 이러한 필요를 모두 채우고 미래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니다. 어쩌면 세상의 기준으로 롯이 이것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마땅한 선택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도 가족이 있고, 목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아브라함만 바라보고 있구요. 그에게도 학교, 시장이 필요합니다. 많은 가축들에게 편하게 먹일 풀과 물도 필요합니다. 때로 세상의 즐거움도 필요할 거구요. 그러면 왜 아브라함이 그런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롯에게 가족과 자녀들, 목자와 가족들에게 필요한 학교, 시장, 병원이 먼저 보였고, 가축들에게 먹일 풀과 물만 보였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것들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였고,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보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했고, 13절에 롯이 선택한 땅에 거주하는 “소돔 사람들은 대단히 악하여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네 후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할 것이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너는 일어나 이리저리 다니며 그 땅을 사방 살펴보아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13:14-17)
사랑하는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 어떤 약속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어떤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던가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심으로 그 축복의 약속,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혹 지금 눈앞에 닥친 타향살이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그 너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심으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하신 하늘의 신령한 축복, 땅의 기름진 축복을 성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넌, 오직 나만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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