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누가복음5:1-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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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저 어린 때는 KBS, MBC, TBC 이렇게 3채널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촌사람이라서 채널을 바꿀 때마다 TV가 잘나오는 방향으로 안테나를 돌려야 했습니다. 김일 선수 레슬링이나 재미있는 드라마 할 시간이면 집집마다 아이들이 안테나에 매달려 서로를 보며 깔깔거렸던 추억이 있습니다.
요즘 케이블TV에 채널도 많고 프로그램도 참 많습니다. 대부분이 재방송이죠? 그 재방송 프로그램들 중에 “무슨 하이라이트”하는 조금 특이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인기있었던 드라마를 줄거리만 편집해서 짧게 재방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20-30회를 다 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텐데 1-2시간 만에 뚝딱 전체의 줄거리만 보여줍니다. 그러다보니 줄거리는 대충 알겠는데 장면, 장면 연결이 잘 안됩니다. 주인공이 서울로 간 것은 알겠는데 왜 친구는 따라갔는지는 편집돼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간혹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들 없으세요? 오늘 성경 본문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짜고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망설임 없이 따라나섭니다. 전후의 맥락은 없고,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제자들이 따르는 장면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다 큰 성인이 말 한마디에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일까요? 부르시는 분은 그 사람이 필요하니 부르셨다고 쳐도,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걸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마치 본방송은 못보고 무슨 하이라이트 편집 방송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 방송을 다보고 편집된 방송을 보면 어디가, 어떻게 편집된 것이지, 어떻게 내용이 전개된 것인지 알 수 있지만, 본 방송을 못 본 채 편집된 방송만 보고는 그런 내용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잘 이해가 안갑니다. 다행히 베드로의 경우는 다른 제자들에 비교해서 성경의 기록이 조금 더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궁금증이 전부 해결되지 않습니다.
궁금한데, 알고 싶은데, 본 방송을 볼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그래서 이리 저리 책들을 뒤지다가 지난 해 “송인수”라는 선생님이 쓴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고, 오늘 여러분들과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왜 그리고 언제 예수님을 따랐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따른 사건에 대해 복음서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동생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바로 형을 찾아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형 베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요 1:41).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2) 그후로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던 때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에게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자,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4:19-20, 막 1:16-20).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눅 5:1-11). 베드로가 고기를 잡다가 허탕을 친 상태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와 말씀을 전하시다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자 베드로가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고, 그 때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같은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 하지만,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다보니, 자칫 무엇이 진실인지, 아니면 진실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객관적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유대인에게 왕으로 예수를 전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라 유대인이 이해하기 좋아하는 방법으로 편집한 설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은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를, 누가복음은 누가는 이방인에게 흠없는 참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를 사랑으로 오신 참 하나님으로 전하기 위해기 위해 편집한 설교입니다.
설교는 역사와 기술 목적과 기술 방법이 다릅니다. 객관적인 증빙 자료의 제공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만을,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법으로 편집하여 전하게 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중 예수님을 만나서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동생 안드레의 제안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 충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더 만남이 있는데,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기 위해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의 만남입니다. 아마 이 두 사건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만 오늘은 이야기에서는 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동생 안드레가 주선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요 1:40).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따랐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1:29). 다음 날에도, 예수님을 보며 다시 한번 “보라,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 (1:36). 이에 안드레를 포함한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과연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임을 알았을 겁니다.
안드레는 제일 먼저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며 형을 데리고 예수님을 다시 찾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자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그런데 베드로가 바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성경(마, 막,눅)은 그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다시 예수님을 만나 그의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전합니다.
두 번째 만남은 갈릴리 바닷가(게넷사렛 호수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왜 첫 만남에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동생의 소개로 만난 예수님은 분명히 비범한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베드로(게바)로 바뀌어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의 어투와 태도는 진지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안드레의 말대로 메시아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의 현실은 너무 무겁습니다. 아내와 자식, 동생 안드레, 장모를 책임져야 할 가장(家長)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마음속에 어떤 끌림이 일었다고 해서, 생활을 뒤엎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일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것만도 고민스러운데 이번에는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所聞)이 들려옵니다.(눅 4:14-15). 안식일에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유대 랍비들과는 달리 가르침에 능력이 있고 귀신 들린 사람, 아픈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온 갈릴리가 그 분의 이야기로 요란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의 질서를 다 뒤집어엎는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단지 선생(先生)이라면 적당히 따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메시아가 맞다면, 그분에게 자기 삶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전에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민중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웅변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 사라졌고 그들에게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 역시 넘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젊고 책임질 가족이 없다면 잠시 돌아가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에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그에게 인생을 걸었는데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도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던 갈릴리 호숫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눅 5:1-3). 예수님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호숫가에 빼곡하게 밀려옵니다. 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정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배가 두 척 있었고, 베드로를 포함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치고 그물을 청소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배에 오르시고, 게다가 안드레와 함께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고 하니 베드로도 그물을 씻던 손을 멈추고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순간 베드로의 심경이 어땠을 까요? 고기도 못 잡았는데 사용료로 얼마를 받아야 하나 고민했을까요?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우리 동네에서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기적을 보여 수많은 사람이 열광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을 따라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또 기적이 필요할 만큼 병약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먹고 살기에 바빠서 조국의 해방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혁명가로 추종한다고 해도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어부의 삶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어부의 삶을 아십니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는 고단한 삶을 아십니까? 어제도 나는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내 삶이 이렇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내 삶을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선생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친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가지 않고 뜬금없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4) 고 말씀하십니다.
왜 뜬금없이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베드로의 고민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나에게 어부의 삶을 아느냐, 고기 잡는 것의 의미를 아느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고단한 삶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대답을 하고자 합니다. 그 대답을 통해 내가 당신의 배와 당신의 삶에 올라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리고자 합니다. 그러니 ‘저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눅 5:5) 여기서 “그물을 내리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단순하게 말씀에 순종을 의미할까요? 이 말은 “확인해 보겠다. 해답을 찾아보겠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내 인생을 아십니까? 오늘도 허탕친 어부의 고단한 삶을 아십니까?’라는 마음속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반응하시니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는 그물을 내리겠노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근처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웠지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말씀만 잘하는 게 아니라 고기도 잘 잡네!’ 하는 정도의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보다 내가 당신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기 싫은 정도로 곤고한 삶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눅 5:8)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선생(先生)’에서 ‘주(主)’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죄인(罪人)’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선생(先生)’은 누구입니까? 알고 싶은 게 있을 때 필요한 대상이 선생입니다. 선생에게 여러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삶의 주도권은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 선생에게 자신의 삶 자체를 맡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主)’ 는 누구입니까? 삶의 주도권을 넘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자신을 던져도 죽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삶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왜 스스로를 죄인(罪人)이라고 했을까요? 위대하신 존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걸 뭐’ 하는 생각으로 넘겨 온 죄와 허물 많은 삶이 빛 앞에서 떠올라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가장 큰 슬픔이자 부끄러움은 따로 있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동생의 소개(전도)로 메시아를 만났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가 나타났는데 따르지 않고 냉담하게 생계에 연연해 한 것이 가장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고기잡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본 이상 베드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현장에서 그 사실을 보았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뿐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베드로의 고민이 오늘 나의 고민과 많이 닮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압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심도 믿습니다. 그런데 가족문제, 직장문제, 주택문제, 집안 문제 무엇 하나 녹녹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나 같은 것을 기억하시겠어?’ ‘이런 문제까지 관여하시겠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거라. 그러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물을 던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올 때, 우리는 고백할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물을 던져야 아는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인생의 깊은 곳에 삶의 그물을 던지시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답, 생명의 답을 찾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물을 던져야 아는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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