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홍사관 설교

  • 생명의 말씀 >
  • 황규홍사관 설교
이제 물동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황규홍 2019-09-03 추천 0 댓글 0 조회 426
[성경본문] 요한복음4:1-30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지난 320UN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2019 세계행복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해마다 세계 156개 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합니다. 올해 한국의 행복지수는 156개국 중 몇 위나 했을까요? 한국은 행복지수 10점 만점 중에 5.895점을 받아 54위를 기록했습니다. 작년에 57위를 했으니 3계단 상승했지만 그렇게 썩 만족할 만한 점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좋은 학교를 졸업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자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결혼하기 좋은 사람의 조건은 돈과 안정성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안정적 지위를 보장하는 좋은 직장과 그 좋은 직장을 들어가게 해주는 좋은 학교, 그런 좋은 직장에 다니는 좋은 남자가 있어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조건으로 생각하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2위 사이에가 돼야 합니다. 지난해 한국의 GDP 규모가 세계 205개국 중 12위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GDP가 제일 많은 미국이 1위를 해야 하는데, 미국는 19위에 그치고 핀란드가 1위를 했습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부탄이 1위했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이란 것이 있습니다.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가 말한 소득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행복도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그 근거로 바누아투·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높고, 미국·프랑스·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행복지수가 낮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은 상대적(相對的)행복입니다. 더 좋은 무언가가 나타나면 지금의 조건으로는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이런 절대적(絶對的) 행복, 즉 남들과 비교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만족을 주는 행복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 급여 관계없이 일 자체로 긍지와 보람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행복 중에서도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행복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불행한 인생으로 끝이 날것이고, 불행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났다면 행복한 인생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방금 전에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포함한 4장 전체 내용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여인은 비록 불행한 삶이었지만 주님을 만났기에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에 속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영접하기까지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비중있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뒤 영접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봄으로 그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의 비추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겪은 시행착오(試行錯誤) 없이 예수님과의 참만남을 영접을 이루셔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오셨다가 사마리아를 통과해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심으로 발발됩니다(4:4). 유다에서 갈릴리로 가는 주요 경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마리아를 거쳐 곧 바로 갈릴리로 가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사마리아를 돌아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가는 방법입니다. 돌아서 가는 길이니 당연히 시간이 더 오래 걸렸으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후자를 선택해 왔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왕국은 남유다과 북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그 후 강국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점령(주전 722)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방시키고, 앗수르인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왕하 17:23이하). 앗수르인들은 북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자기 나라에서 섬기던 신상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상과 여호와를 함께 섬겼습니다(왕하 1725, 28, 32 ).

136년 뒤, 남유다도 바벨론에 멸망(주전 586)당하여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0년 만에 그들을 다시 본국으로 귀환시켜 주셨습니다. 본국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 건축에 참여하고 싶어 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4:2이하). 이 일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적대심을 품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습니다.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00년경,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전 128년 그리심산 성전에 화재가 나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최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을 성소로 인정하는 시가서와 선지서를 거부하고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유대인들은 혼합적 종교 생활을 하는 사마리아인들을 상대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불결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 지역을 방문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방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불편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연이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굳이 통과하려 한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민족 간 적대 관계 속에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특별한 의도를 계산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별한 의도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바로 사마리아 지역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난 여인치고 기구하지 않은 여인들이 없습니다만 이 여인의 삶은 더 기구했습니다. 이 여인은 결혼을 다섯 번 했다가 이혼했고 지금은 다른 남자와 동거 중이었습니다.

 

그럼 이 여인은 왜 다섯 번이나 이혼을 했을까요? 혹시 성적 범죄를 일으킨 여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언뜻 듭니다. 제 생각이 맞을까요? 이혼에 대한 모세의 율법에는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24:1)” 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조금 덜 착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남편들이 아내가 싫어지면 이유 없이 이혼하고 내팽개치는 풍조가 확산되는 것을 보고, ‘수치 되는 일이 아니면 결코 이혼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남자가 이혼을 남용해서 여자들이 피해를 입자, 모세는 이혼 사유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으로 여자들을 지켜 주기 위해서 이혼 규정을 명시합니다. 이혼하려면 반드시 수치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이혼 증서를 써 주어야 하며, 이혼 증서에는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명시하도록 했습니다.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수치되는 일성적 타락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율법에 간음은 사형이지 이혼의 사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율법을 더 강화하여 음행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19:7-9)고 하신 걸로 보아 간음이나 음행만을 가르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규정을 볼 때, 수가성의 여인은 다섯 차례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남자로부터 이혼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섯 번씩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로 그 여인은 참 괴로웠을 것입니다.

 

건강검진 문진표를 보면 이혼이나 사별이 최고의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 인생에 가장 큰 괴로움을 주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혼을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했으니 그녀의 삶은 죽다가 살아난 삶,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삶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혼 후에 그녀는 다시 어떤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지금 사는 남자와 혼인이 아닌 동거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남자들이라면 치를 떨리겠지만, 여자는 남자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던 당시의 상황이 이 여인에게는 더 큰 괴로움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혼인신고도 안하고 동거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결코 덕스럽지는 않으니 자연히 동네에서는 구설수(口舌數)에 올랐겠지요.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렸을 테고, 다른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오는 시간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해가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개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 그런 사마리아인들도 사이에서도 개로 취급하는 이 여인의 고단한 삶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고, 구원이 간절했을 텐데, 이 여인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지지난 주일 살펴보았던 베드로와는 다른 모양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남자라서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정말로 목이 마르셔서 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을까요? 이 여인과 말씀을 나누시기 위해 물을 청하셨을 텐데 이 여인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였다. (4:9 , 현대인의성경)”

 

지금 이 여인은 인종, 문화, 율법, 관습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 문화, , 규범, 관습, 이런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복음을 거절하고 방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여인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이 말은 만일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네가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주님, 제게 생수를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받아, 여인은 다시 질문합니다.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 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4:11-12, 새번역)”

 

이 여인이 이번에는 소위 과학, 상식, 이치 이런 것들로 예수님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과학,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출발은 철학(哲學)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신학(神學)이라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인식이 철학(哲學)이고 여기서 모든 인간의 학문이 출발했고, 사상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규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핑계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인간의 과학, 사상, 이치로는 여인과 우리들의 죽음을 향한 삶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지만 당신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쯤 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 여인 또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4:15)” 여인의 말은,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게 해 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한 낮에 물러와야만 하는 고단한 삶이 멈추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런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놓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자존심(自尊心), 체면(體面)이 예수님을 향한 발걸음을 막습니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 특별히 남자들이 이 자존심, 체면 때문에 예수님 앞에 속마음을 드러내 놓지 못하고, 똥폼만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4:16). 예수님은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여인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고, 여인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자 남편이야기를 꺼내십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또 자존심, 체면 때문에 한 번 더 마음을 감춥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4:17)” 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내 고단한 삶의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해버립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여인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답변을 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4:17-18).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네가 얼마나 고통을 받아 왔는지, 네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내가 안다. 네가 왜 이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오는지도 알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는 네 사정을 내가 안다. 그래서 내가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주겠다는 것이란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 영적 매력을 느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본질이신 예수님을 인정하는데 가로 막는 형식이 남아있습니다. 이번에는 종교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하나님 보내신 선지자이신 것은 인정하겠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의지할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이 여인 그래서 여섯 번이나 힘든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심산에도 올랐을 겁니다.

 

그런데도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에 대한 불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리심산이니 예루살렘이니 하는 종교갈등과 분열에 염증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심과 염증을 구실로 예수님과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3-24)”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과 말씀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참예배는 장소와 예전 같은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본질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형식밖에 모르는 인생이 어떻게 본질이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죄가 없는 선한 하나님께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속죄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이 구원의 말씀을 먼저 주셔야 가능하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메시아를 보내 주셔야 가능합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4:25). 메시아가 누군지 궁금해서 던지는 호기심 섞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 조상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 내가 그토록 찾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당신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고백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4:26) 주님의 말씀에 이 여인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을 겁니다.‘! 이 목마른 인생이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서 생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일들로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하면서 버려진 삶, 고단한 삶을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찾아오셨구나!’

 

행복과 기쁨을 가눌 길 없어진 여인은 그 길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맛보았으니 더 이상 물동이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종문화관습의 물동이, 과학이치학문의 물동이(), 자존심체면위신의 물동이(), 양심종교신념의 물동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습니다.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푸른초장 가족 여러분, 본질이신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형식의 물동이를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보겠노라고 기를 쓰면서 채우시려는 상대적 행복의 물동이를 버리시고, 절대적 행복의 본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수가성의 그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남으로 물동이를 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와 보라고 자랑하던 삶이 그 여인의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푸른초장영문이 영적 야곱의 우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황규홍 2019.09.15 0 313
다음글 그물을 던져야 아는 답이 있습니다 황규홍 2019.08.21 0 307

구세군 푸른초장교회는 2025년 5월 31에 폐교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계속되는 홈피는 20년간 푸른초장교회에서 올린 자료를 보관하고 회원들의 동정과 글을 나누는 모임방 용도로 변경되었습니다.

Copyright © 푸른초장교회모임방.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2
  • Total101,636
  • rss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