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1:30-4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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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지난 여름 영동 백화산 수련원에서 진행된 청소년 파워 캠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셨던 사관님이 사관헌신자(앞으로 사관이 될 것을 서원하는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비석에 나와 사관으로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있었습니다. 사관 자녀였던 한 여학생도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비석으로 나가려는데, 누가 뒤에서 붙잡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언제 오셨는지 그 여학생의 어머니 되시는 여 사관님이 딸을 조용히 붙잡아 끌고 계시더랍니다. 밖으로 나온 딸이 “영문의 학생들에게는 헌신을 권유하시던 엄마가 왜 나의 헌신은 말리세요?”라고 묻습니다. 그 엄마 사관님이 말씀하시기를 “넌 내 딸이잖니? 그냥 분위기에 취한 것일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딸 아이가 “엄마는 설교하시는 것 따로, 살아가시는 것 따로 이신가요?”라는 항변에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회개했던 이야기합니다.
어느 여 사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따로따로”의 문제는 단지 이 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경우는 다르겠지만 많은 신앙인들이 살아가면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들어 보셨을 줄로 압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응답)) 요한은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썼을까요? 물론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주인공인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하는 질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 이니까 대부분 ‘나사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사로는 철저하게 단역입니다. 대사 한마디도 없이 죽는 사람 역할을 맡았다가 나중에 일어나서 퇴장하는 단역을 맡았습니다. 적어도 요한이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씀을 기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럼 요한은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할까요? ‘마르다’입니다. ‘마르다’가 어떤 사람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예 맞습니다. 나자로의 여동생이고, 마리아의 언니 그 마르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자기는 열심히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서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화를 냈던 그 마르다 맞습니다.(눅 10:38-42) 그래서 보통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 그러다 나중에 화가 나서 동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 중독자 혹은 신앙의 깊이 없이 봉사만 하는 사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더 가까웠던 마리아가 조연으로 등장하고, 주연을 맡은 마르다가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실로 위대한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정관념을 갖고 마르다를 봐 온 우리에게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가정에 어느 날 불행이 찾아옵니다. 오빠가 중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와 주시기를 청합니다(요 11:3). 그런데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11:6)라는 표현을 볼 때 오히려 의도적으로 늦장을 부리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틀 후 출발하셨고, 이틀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무려 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11:17). 그렇다고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베다니까지 엄청나게 먼 거리도 아닙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은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이틀을 머무셨습니다(10:40). 그곳에서 나사로가 있는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는 2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룻길이면 될 거리를 이틀 걸려 도착한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을 아시고도(요11:4,14) 2일을 늦추고, 1일이면 갈 거리를 2일이나 걸려 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조급할 것 하나 없어 보이게 행동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늑장을 부리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사로를 고치러 갈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상황을 기록한 요한복음 9-10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눈 뜬 사람 사이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두고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후 수전절(하누카, Hanukkah)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또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로 추측만 하게 만들 작정입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지만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은 내 아버지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며, 그것은 말보다 더 분명한 증거다.”“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에게는 파괴자의 손길이 결코 닿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들을 내게 맡기신 아버지는 파괴자나 도둑보다 훨씬 크신 분이다.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한 마음 한 뜻이다.”
유대인들이 또다시 돌을 집어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온 많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다. 너희는 그 중에 무엇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은 당신이 행한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일컫는 신성모독(神性冒瀆) 죄 때문이오.” (요 10:24-33, 메시지성경) 예수님이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임을 강조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은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빠져 나갔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제자들은 주님이 나사로를 고치러 베다니로 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을 고비를 넘겨 도망친 예루살렘과 고작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1:18). 지금은 유대인들을 피해 숨어 있는 것이 상책인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주님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깨워야 되겠다.”(11:11)라고 말씀하시니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푹 쉬고 기분 좋게 깰 것입니다.”(11:12)라고 모르는 척 하며 가지 말자고 버팁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이제는 그에게 가자”(11:14)고 하시자 도마는 화가 나서 “갑시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11:16)라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할 정도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의 신변이 위험을 알고 있었겠지만 나사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결국 오빠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매들은 서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끝까지 오지 않으셨다면 모를 일인데,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셨으니 더욱 야속한 일이었을 겁니다. 오실 거면 진작 오시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진짜 오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백부장의 종처럼 원격으로 고쳐 주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했을 법합니다(눅 7:1-10). 그런데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째 되는 날, 주님은 뜬금없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유대 땅 베다니로 가기로 하셨습니다(요 11:7).
물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신 직접적 목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함이었지만 성경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 이었다’고 말씀합니다(11:15). 제자들이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22-42) 주님은 이 두 가지 동기를 갖고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째 되는 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때에 베다니를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와 주님의 대화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먼저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이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들어 주실 것을 제가 압니다.”(요 11:21). 주님이 대답합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11:23).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지막 부활의 날에 성취될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살아날 것을 제가 압니다.”(11:24).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지금’ 살리겠다고 하시는데, 마르다는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말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러 오셨는데, 마르다는 죽음을 위로하는 조문(弔問)인 줄 알았습니다.
이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11:25-26). 주님은 부활 신앙을 마르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에 마르다는 깜짝 놀랄 고백을 합니다.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11:27). 이 고백이 어떤 고백입니까? 바로 주님이 오랫동안 제자들에게 알려 주려 하신 자신의 신분에 관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의 신분을 드러내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성모독 죄라며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고(10장),제자들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지만, 유일하게 베드로만이 했던 고백했습니다(마 16:13-18). 그런데 이 믿음의 고백을 뜻밖에도 마르다가 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고백에는 한계(限界)가 있었습니다. 물론 마르다는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백을 자신의 문제에는 적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일이지 오늘의 절망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죽은 오라비를 살리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시신이 있는 무덤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죽은 지 4일이 되어 벌써 시신이 상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요 11:39)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따로 오빠가 이미 죽었다는 고통 따로 생각합니다. 이 두 사실이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따로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부르시니, 나사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족은 베로 동이고 얼굴은 수건에 싸인 상태로 무덤 바깥으로 나왔습니다(요 11:43-44). 그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은 사람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오빠가 살아났으니 마르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에 관해 바르게 고백했지만, 그 고백을 자신의 절망과 연결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고백 따로 절망 따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르다에게만 해당할까요? 우리 또한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일상에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문제를 만나면 그것을 예수님과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네 절망이 무엇이냐? 네가 자포자기했던 무덤 문을 내가 열겠다. 내가 너의 절망을 다루겠다.”고 하실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주님이 필요하니 와 달라고 부탁드릴 때는 침묵하시더니, 모든 가능성과 소망이 다 끊어진 지금에 와서 무덤 문을 여시겠다고요? 시체가 썩은 지 벌써 나흘인데요?” 마르다처럼 이렇게 대답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사랑하는 푸른초장 가족여러분, 우리가 믿는 성삼위하나님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심은 저도 여러분도 제자들도 마르다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분이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분이 대단한 분이심을 믿는 것도 큰 믿음이지만, 그분이 저와 여러분의 작은 신음과 고통도 듣고 계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임을 믿는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 성삼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아빠를 의지하는 것처럼 가장 작은 신음과 고통까지도 듣고 응답하시는 것을 믿고 행동하심으로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과 같이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 축복과 은혜를 삶을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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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카(Hanukkah)는 BC. 2세기,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유대교의 중요한 명절이다. 성전을 되찾은 후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신상을 치우고 불을 밝혀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했다. 이로 인해 하누카는 ‘봉헌절’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또 명절이 이어지는 8일 동안, 가지가 아홉 개인 촛대 ‘하누키아’(hanukkiyah)에 불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기 때문에 하누카는 ‘빛의 축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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