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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성결의 사도 브랭글의 대학시절
홍성효 2010-01-14 추천 0 댓글 0 조회 169

브랭글의 소명

 

1872년 가을 브랭글이 12살 때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서의 '회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호기심은 12살 되던 1872년 가을부터 감리교회에 참석한 후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고자하는 사무엘의 소망은 연기되었다. 왜냐하면 그날 설교자는 열린 마음,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는 귀, 순결한 마음을 강조했지 자비석으로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년시절 그가 출석한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판에 박힌 복음 설교를 듣고 나서 통회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초청에 반응을 보인 후에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무엘은 집에서는 식사 전 은혜의 말씀, 가족기도, 성경읽기는 평소 경험의 일부였다. 그가 받은 영적양육을 회상하며 글을 썼다.'나의 기억가운데 가장 거룩한 시간은 어린 시절 집에서 쌓던 가정 제단이었다. 새 아버지의 왔다 갔다 하는 격렬한 성격 때문에 가정 제단은 불규칙적이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땐 나의 영혼은 이상하게도 은혜로워 내안에서 흥분하고 꿈틀거리게 되었다.'

 

1873년 12월 24일 13세 때 감독파 감리교회에서 개최한 부흥집회에 5일간 계속 관심을 갖고 참석했다. 이때 설교자가 새로운 구도자는 통회의 자리 앞으로 나와 기도하라고 초청을 했다. 그때 브랭글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회개석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참 마음으로 기독교인 되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지는 느낌이 없었다. 다음날 계속 집회에 참석하여 애를 써가며 간구했으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5일째 되는 날 밤에는 모친이 직접 곁에서 권면했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 일까? 라고 고심했다, 그날 밤 사무엘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야겠다고 간증한 후에 교회를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다고 하는 확신을 여전히 느끼지 못했다.

 

몇 주가 지난 후에 어머니와 기도회에 참석하러 교회로 걸어가면서 ‘어머니 우리가 택사스로 이사 가지 않아 다행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곳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라고 대화하는 동안 사무엘은 구원에 대한성령의 증거를 받았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후에 브랭글은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현상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5일 동안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황홀감, 불의접촉, 환상, 불타오르는 감정을 찾고 기다리며 회개석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하나님께 나를 드렸고, 꿇었던 무릎에서 일어났다. 감동은 그 후에 왔다. 그것은 전율, 환상, 황홀감, 환희는 아니었다. 그것은 평화, 확증, 행복, 하나님께서 수락하신다는 감정, 나의 내적 전 존재에 퍼지는 호의, 부드럽게 퍼지는 온화함.... 그 순간 나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행복이었다.’ 후일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신이 받은 영적체험을 간증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 이라고 가르쳤다(롬 10:10).

 

모친은 계속 나의 비뚤인 생각을 할 때마다 바로잡아주었고 온유하며 부드러운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다. "나는 집회시간마다 회개석 앞에 엎드려 넘치는 희열과 성령 불 체험받기를 간구했고, 환상 환희 그리고 불타는 열정을 체험하게 되기를 맹목적으로 구하고 기다렸다. 나는 헛된 기다림이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 다음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구하기만 했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받치는 순간 간구하던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사무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친구와 함께 있다가 사소한 일로 언어폭력과 주먹을 쥐고 분노하며 추행한 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셨다는 성령의 내적증거를 잃어버렸다. 죄를 지었을 때 죄의 본성이 안에서 계속되는 결과를 보고 참회기도를 한 후에 죄의 용서와 평화를 되찾았지만 내적 정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결국 성결을 찾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15살 때 주일학교부장을 돕는 부장보로 뽑혔다.

 

1874년. 그는 1년 동안 올리 고등학교에 등록했다. 다음 해 클레아몬드 학교로 전학하여 1년간 수업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어머니를 주말엔 만나 보려고 노력했지만 사무엘은 집에서 학교가 15마일이나 떨어져서 통학할 수가 없었다. 수사학 교수인 힌맨(Hinman) 댁에서 2년간 함께 지냈다. 힌맨은 사무엘의 웅변하는 솜씨를 듣고는 장차 설교준비에 필요하다고 칭찬하면서 그 솜씨 가지고 법조계에 들어가려는 생각은 버려라. 곧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법률가가 되는 순간 그 성공의 개념이 자신을 저주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한 말이 자주 떠올랐다.

 

어느 날, “모친 사망 속히 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한 시간 늦게 집에 도착 했지만 사무엘은 고아가된 것을 느껴졌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사무엘은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삶을 살아야할 필요성을 곰곰이 생각했다. 브랭글은 모자간의 신비로운 결속이 어머니가 죽음으로 인해 관계가 깨져 깊은 상처로 슬퍼하고 우울증으로 몹시 시달리며 자신감의 결핍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이때 힌맨 교수는 그에게 불행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것이라는 야망을 심어 주었다. 사무엘의 삶을 곧게 치세워주려는 힌맨 교수는 지혜롭고 인내심을 갖고 지식에 대한 사무엘의 갈증에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그에게 대학교육을 준비하도록 수개월 동안 멘트 했다. 어느 날 클레이몬드 학교에 월터 고포스(Walter Goforth)라고 하는 젊은 법률가가 찾아와 일리노이주 남부에 위치한 맥캔드리 대학(McKendree College)출신이 모교를 홍보했다. 친구들은 사무엘에게 맥캔드리 대학으로 가라고 권면했으나 사무엘은 감리교단에서 운영하는 에스베리 대학교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농장을 매각한 자금으로 1877년 9월 인디아나 에스베리 대학교에 등록했다. 대학입학에 필요한 고등학교 학점이 충분하지 않아서 사무엘은 예비학교에서 2년을 보냈다. 그는 대학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학교에서 큰 반을 가르쳤고 대학YMCA의 회장으로 뽑혔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웅변이었다. 브랭글은 1879-1883까지 이 분야에서 탁월했다. 열정적으로 웅변을 연구를 했으며 캠퍼스나 인디애나 주에서 개최하는 언어능력시합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럴 때 마다 브랭글은 힌맨 교수의 경고가 항상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나님은 브랭글을 모세나 바울처럼 쓰시기 위해 하나님의 학교에서 훈련시키시고 계셨다.

 

브랭글은 매일 기도하고 영적인 경험을 토의하기위해서 8개 대학학생들로 구성된 그룹인, 옥타곤 클럽회원이 되어 성결에 이르는 길에 관심 갖고 깊이 연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신성 클럽처럼 이 그룹은 성결에 대한 연구를 위한 촉매 역할을 했다. 그룹토의시간에 초청된 지역 목회자들과 정규적으로 만나는 대학토론 그룹인 문화강좌에 참여하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다니엘 스틸 박사(Dr. Daniel Steele)의『이정표(Milestone Papers)』와『사랑(Love Enthroned)』을 통해 성결과 온전한 성화체험 수업을 이수한 후, 성결의 필요성 인지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온전한 성화의 체험에 관하여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야망은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께 ‘주여 이제 나는 없습니다.’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기도했다. 은혜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의 생애는 주님께 고정되어 제2의 축복인 성결의 복음을 증거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열심히 사역을 감당했다. 사무엘은 대학생활을 마칠 때 가까이 지낸 동기 앨버트 J. 베버리지(Albert Jeremiah Beveridge)에게 "만약 내가 교회 감독이 될 때쯤 자네는 미국 상원 위원으로 사역하는 행운이 주어지기를 소망하겠네."라는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도움 받은 글

Hall, Clarence W. Samuel Logan Brengle: Portrait of a Prophet. 1933.

Rightmire, R. David. Sanctified Sanity: The Life and Teaching of Samuel Logan Brengle. 2003.

Stiles, Alice R. Samuel Logan Brengle: Teacher of Holiness.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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