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모 김 순자 '
하얀 국화꽃 덩어리 속에서 잔잔하고 단아한 미소로 우리 모두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1970년 사관학교 재학당시의 군복차림의 영정사진이었다. 26년간 장로교 목사의 아내로, 그가 가졌던 직함은 '사모님' 이었지만, 마지막 그의 삶을 총정리하며 그녀와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우리 동기생 사관님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한 마디가 거기 그렇게 조용하게 웃고 있었다.
1969년 9월, 21명의 젊은이들이 각자 하나님으로 부터 21가지 모양의 부르심을 받고 정동 구세군 사관학교에 모였었다. 소위 이름하여 '승리자의 학기' 의 이름으로.
지금은 본영건물로 쓰이는 구 사관학교는 그 당시로서는 그 장소에 못지않는 멋진 곳이었고 한국 구세군의 역사가 태동되고 무르익어 갔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울고 웃으며, 젊음을 나누었고 1971년 사관이 되어 40여년의 사역을 마치고 이제는 거의 은퇴한 노장들로서 각자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감사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중에 한사람이 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구세군의 사관으로 10년 동안, 많은 눈물과 희생으로 복음을 전하며 수고하셨고, 개인의 사정으로 장로교로 옮겨서 특유의 개성과 신념으로 교단에서도 인정 받는 목회자로 노년을 맞은 위리의 친구부부이다. 3년전 사모님이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 동안 투병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않아 자주 연락이 닿지 않았었다. 다만, 동기들끼리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계속 투병하고 있음을 알고 기도하고 있었을 뿐....
그러던 그녀가 오늘 조용히 잠자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손가락 마디만한 옛날 사관학교 시절의 반 증명판 사진을 맡기면서 자신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수백명이 되는 교인들을 가진 목사의 아내로서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다 함께 모인 우리 동기 사관님들의 마음은 더욱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어느 교단을 지칭하고 가르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젊었던 시절,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함께 나누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단아한 군복차림의 그녀의 영정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목요일 가로전도에 나가려고 바삐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북과 탬버린, 군기를 챙기고 순서 맡은 이들이 김석태 교관님과 함께 점검을 하는 사이, 그녀는 바쁜 틈을 타서 늘 나를 살짝 부르곤했다. 그녀의 방 연탄아궁이 앞으로.
길거리에 나가 전도하는데 머리가 흉하면 안된다는 그녀의 얌전했던 마음과 유난히 손끝이 야무져 연탄불에 구운 구식 고데기로도 제법 곱상한 머리모양을 만들어 냈던 그녀의 야무진 손재주덕이였다. 둘이 연탄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만지던 모습을 우리 동기들은 모두 기억하리라. 그러면서 그녀는 조용조용히 인생의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내 귀에 들려주었었다.
1997년 미국에서 돌아온후, 병을 얻기전에 두어번 그녀를 만났었다. 그리곤 영정 앞에 선 오늘, 65세로 이 땅위에서의 사역을 훌륭히 감당한 한 구세군의 여사관 앞에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본다. 이렇게 떠나버리면 그만인 것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한가지 생각이 돌아서는 우리 모두의 발걸음을 비장하게 만든 귀한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전철안에서 되뇌인 싯귀는 천상병님의 "귀천"이었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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