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세군의 창건자가 영국의 William Booth(1829.4.10~1912.8.20.)임은 그 누구나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 구세군에 담긴 기본 정신과 교지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다.
유독 한국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은, 구세군이 일백년 전인 1908년 당시 이 나라에 이식된 이래, 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박한 역사적 동기배경 및 그 당위성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아카데믹하게 연구 계발, 교육시키지 않은데 기인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원인은, 우리 모두 영문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기복신앙 형태속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 추구에다 초점 맞춘 일반 유수 교회 신도들 아류(Epigonen)가 되어 동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행동은, 사리 분별없이 무조건 믿고 닮는다는 일종의 맹신자처럼 평가하게 되거니와, 특히 구세군 창건자 William Booth 장본인이 당초 애써 설정한 선교 궤도와 신앙노선에서 아주 한눈 팔고 일탈해 버린 극히 그릇된 현상인 것이다. 그에 따라, 통상 신앙인 처지로선 그 눈부신 구세군주의(救世軍主義)를 비롯하여 최고 의식과 이념을 올바로 알턱이 없게 된 것이다.
그 탓으로 작금엔 우리 교단마저 은연중에 오로지 <영혼> 구원이라는 그 단출한 방편을 사명의 좌우명(motto)으로 삼아 표방하고, 복음 확산 대책과 더불어 교회성장에 열중하려 든다. 그러나 그 같은 반편적 사상 주류 지향은 William Booth가 원래 내걸고 품었던 숭고한 본연의 뜻과는 괴리가 생기며, 되레 배치된다고 할수 있겠다.
왜냐하면, 단지 <구령>문제 뿐이라면, 구세군을 처음 창건 무렵인 1865년 영국의 각 교단들은 저마다 불완전하나마 그런 임무 수행쯤은 진작부터 나름대로 진력했던 바이고, 그래서 저 William Booth가 구태어 새로운 구세군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덩달아 부질없게 나타날 필요가 과연 있었겠느냐 라는 절대 부동의 의문이 우선 앞서기 때문에서다.
그런 필연적 정황 예단임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이 만약 <구령> 선교 그 목적 한가지 달성에만 투지일관으로 뛰어든다면, 그것은 다른 교단 모두 다 경주하는 그 선교 사업인데다가 흡사 덧니와 다름없게 아니, 적절한 표현으로서 옥상가옥일수 밖에 더 있는가라는 힐난이 반드시 제기되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William Booth 그가 그의 생존시 구세군 기치를 높이 들고서 힘차게 휘날리며 극구 주창하고 발휘하여 가르쳤던 그 기본 선교 정신과 교지를 철저히 재 파악해 둬야한다.
가령, William Booth가 사회악 제거와 더불어 인간회복을 위하여 부단히 혼신의 역량을 다 기우렸다라 던지, 또 주변 보좌역들에게 무릇 <구령>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풀려거든 <육신>에 딸린 제반 난제도 함께 해소해 줘야만 된다고 자주 역설한 그 분야와 관련해서이다. 즉, <영혼> 별개, <육신> 따로가 아니라 동일선상의 시각에서 다루라고 누누이 일른 그 대목을 허술히 넘기지 말고 눈여겨 보라는 것이다.
그중 작금에 이르도록 빛나게 전해져 온 한 마디는 이른바, <굶주린 무리에게 설교만 하지 말고 빵도 곱급해 주어라!>던 그 영구 불변의 명언, 그 것이다.
이에 이어서, 꼭 알아 둬야 할 사항이 또 있다. William Booth 그가 구세군을 창건한 가장 큰 근본적 요인과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이다. 그와 관련, William Booth의 마음 속을 항시 요동치게 한 그것은, 그 당시 영국의 각 교회가 매 예배시마다 신도들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차별 양분하여 좌석에 앉히는가하면, 귀족들 생활 양식 풍조에 잠식 당해버린 교회구조 체제, 게다가 상류 계층들만 오롯이 모여 성례전(Sacrament) 치르는 신앙잔치, 그리고 겉치례 일색인 율법주의적 교의(敎義) 등등, 일련의 진부한 틀에서 한껏 벗어나 보다 성서적이며 합리적 선교활동을 강렬하고도 널리 펼치자는 것 그 일념으로 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구세군은 평탄 무고한 가운데 어느 날 느닷없이 갑자기 성립된 소산물이 아니었다. William Booth 그 자신 청년기에 걸쳐 대형 교단의 몇몇 교회를 이미 두루 섭렵하고 관여한바 있었는데, 그 기간 파란 이는 진통의 태동 태풍을 겪어 온 나머지 거둔 값진 결실인 것이다.
그러니까, 구세군이라는 조직기구는, William Booth 그가 한 때 영국 국교인 Anglican Church, 그리고 Methodist파 교회 등지에서 중요 종무 형태를 샅샅이 둘러보는 한편 온갖 시련과 갈등을 넘나든 체험 끝에 구축한 복음전선 전진 기지인 것이다.
해서, 우리 구세군 탄생이야말로 더 더욱 찬연하며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성스러운 창건 창달의 취지 특색은, 다음과 같으다. 몰락한 윤리와 붕괴된 삶의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마구 더렵혀지고 짓밟힌 뭇 인간들의 <영혼>과 <육신>을 균형있게 아우른 <전인적> 구원에 힘쓴다는 그 점이다.
예서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게 있다. 한 인간을 놓고 <영혼>과 <육신> 그렇듯 이분화로 분류해 봄은 오류를 일으킬 여지가 너무나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영혼>이란, 인간 생명의 원리로 지칭하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본체는 죽음이 오기 이전까지는 인체와 유리 되어져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육체와 반드시 결부되어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영혼>과 <육신>은 불가분의 상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육신>은 내버려 두고 오직 <영혼>만 분리하여 별도로 구원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다.
더욱 결정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신앙생활을 하여감에 있어서 우선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간구하는 것도, 찬양 드림도, 교회 예배 참례도, 복음을 전하고 듣는 일도, 헌금 봉납도, 교육 이수 및 의료사업 진행도, 그리고 봉사활동 등등 그 모든 일체의 동작은 <육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스스로 <육신>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정 이치가 그러하매도 불구하고 대개들 <영혼>은 무시간적 불사 불멸성 그것으로 하여 매우 중시하고, 그 상반격인 <육신>이란, 일종의 유형체로서 언젠가 사망으로 이어진 날엔 그대로 고스란히 땅에 묻혀 썪어져 갈, 매우 하찮은 존재따위로 멸시 천대하며 아주 하위개념으로 치부하려고 든다. 이는 매우 편향되고 한정된 발상에서 일어난 그릇된 인식이다.
그러한데도 흔히 기독교 각종 집회에서 목회자 혹은 강사 거의가 한결같이 <육신>에 대한 요항은 제처놓거나 탈루시킨 가운데 <영혼> 구원 문제만 줄곧 꺼내들고 마치 누구에게 마구 덤벼들 듯 내내 쇳소리를, 볼멘소리를 내지르며 열변을 토해 낸다. 그 것은 순전히 오산의 결과인 것이다. <육신>을 입고 태어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올바로 잇고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그 순수한 방도와 지침도 역력히 메시지(message)로서 쏟아 내놔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 <육신>은 마치 콘크리트 건물을 지을시 필수 불가결한 거푸집 구실에 해당, 비견할 수가 있다. 그 형태가 휘거나 굽어 있으면 내용물 콘크리트 역시 그대로 짜이게 되듯 <육신>의 역할도 그 이치 현상과 같으다고 하겠다.
여기서 혹자는, <육신>이란 한낱 썪어 없어질 살덩이에 불과하므로 오로지 천상의 영원 도성 패러다이스(paradise)가 예비 되었으니 순간적 세상 만난은 능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본시 유한한 존재이기에 만사 한계가 있다. 그 결과로 <육신>이 처한 형편이나 주변 환경 그리고 생활여건 여하에 따라선 인간의 정신세계 의지는 얼마든지 좌지우지 무한히 흔들림 당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인격에 얼룩이 간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실상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 계실때 굶주린자, 병든자 그리고 죄 지은자를 막론하고 일일이 맞아 드리시고 검증하시며 돌보셨던 그 이유는 나변에 있으시지 않으셨다. <육신>을 제대로 바르게 살려 놓고 그 다음 소중한 <영혼>을 구원해 내시려는 의도에서 였었다. 그러나 만일 <육신>은 그대로 놔두고 <영혼> 구원에만 치중하셨다면 그런 외형적 번거로운 절차는 애초 손대시지 않았을 터였다. - 2편에서 더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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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컷 해설/1).상징적 그림이지만, 구세군 깃발을 앞세우고 복음전선 격전지 향해 힘차게 행군하고 있다. 2).오는 2008년 10월 1일이면 구세군 한국 입성 100주년 기념일이 된다. 그에 관한 표장. 3). 세계 공통 구세군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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